[데스크 칼럼] 노인과 바다, 그리고 부캉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상어와 사투를 벌였다. 2박3일 고투 끝에 잡은 거대한 청새치는 결국 지키지 못했다. 부산 북항에선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상어를 기다린다. ‘부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느러미가 나타나면 환호성을 지른다. 노인에게 절망을 안긴 상어가 부산에선 즐거움을 주고 있다.

공통점도 있다. 상어는 인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먹으려는 상어를 막기 위해 분투했다. 부캉이는 바다로 돌려보내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인공지능(AI)으로 원하는 그림과 영상을 곧바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은 상어 지느러미를 보려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예측 불허 생명체의 매력

부캉이를 보면 지난봄 대전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 ‘늑구’가 떠오른다. 동물원 안에선 스쳐 지나갈 법한 동물이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행방이 궁금한 존재가 됐다. 시민 안전에 대한 걱정, 늑구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 야생의 삶에 머무르길 원하는 심경이 복잡하게 얽혔다. 동물원과 수족관에서 볼 수 있는 자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그래서 예측할 수 없는 생명체가 더 매력적으로 비친다.

부캉이와 늑구는 AI가 거의 모든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에 날것 그대로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치밀한 영화만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결론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미리 승자를 알 수 없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동영상의 진위를 의심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예측할 수 없는 존재와의 만남은 각별해진다.

AI 무용론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AI가 생성한 동영상을 보면서, AI와 대화하면서도 위로받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AI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느끼려는 욕구도 생겨난다.

기술 너머 기다림의 가치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잡으면서 커다란 생명체가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존중했다. 헤밍웨이는 종국엔 청새치를 잃은 산티아고의 인내와 경험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를 묵묵히 견디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노인의 삶을 높이 평가했다. 어부로 생계를 이어가는 산티아고는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해도 결코 삶을 불평하지 않았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의 삶이다.

젊은이는 떠나고 노인과 바다만 남았다고 자조하는 부산을 상어가 찾아온 사실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AI 혁신에 환호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상어 한 마리를 보려고 물가에 선다. 신기술을 받아들이는 삶과 인간적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공존할 수 있다. 헤밍웨이가 산티아고와 소년 마놀린의 우정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놀린은 산티아고의 경험을 존중했고 산티아고는 마놀린에게 고기잡이를 가르쳤다. 젊은 세대를 불러 모으는 노력만큼이나 노인의 경험과 지혜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상어가 머무는 시간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의 안전에 문제가 없다면 굳이 부캉이를 수로 밖으로 몰아낼 필요가 있을까. 들어온 이유를 모른다고 떠날 때를 사람이 굳이 정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기다림이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좋은 결과를 낳는 해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