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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안보, 물량 확보에서 위기 때 작동하는 ‘권리’ 확보로”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17일 에너지경제연구원 40주년 기념행사에서 “오늘날 에너지 안보는 기존의 석유·천연가스·전력 시스템과 핵심광물 공급망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특히 핵심광물은 정제·가공 능력이 특정 국가에 집중돼 있어 공급망 충격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변화는 에너지를 확보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 이태의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안보정책연구실장은 에너지 안보의 기준을 ‘물량’에서 ‘권리’로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기 상황에서도 실제로 작동하는 공급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산 지분을 확보하거나 장기 구매계약을 맺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원 보유국들이 원광 수출을 제한하고 자국 내 정제·가공을 요구하고 있어서다. 정제시설과 장비, 인력도 공급망의 병목이 될 수 있다. 물류와 정제 과정에 필요한 원료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에너지 전환이 진행될수록 이런 위험은 커질 수 있다. 탄소중립은 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얻는 체계에서 설비를 만들어 에너지를 얻는 체계로 바뀌는 과정이다. 태양광·풍력·배터리·전기차 등에 필요한 핵심광물의 안정적인 공급이 탄소중립 산업의 전제가 되는 이유다.
에너지 안보의 범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기를 사용하는 산업이 늘면서 전력망 자체가 중요한 안보 인프라가 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처럼 대규모 전력을 사용하는 시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에경연은 2040년 국내 전력수요가 수요관리 전 986.3TWh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수요관리 이후 목표치는 847.3TWh다. 다만 발표된 데이터센터 용량이 실제 전력수요와 같은 것은 아니다. 실제 수요는 투자 시점과 가동률, 효율, 계통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전력망을 만드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에는 수요를 예측한 뒤 발전소를 짓고 송전망을 확충하는 방식이었다. 앞으로는 대규모 수요처의 입지와 발전원, 송전망을 한꺼번에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전력 수요 자체가 빠르게 커지는 흐름이 있다. 비롤 사무총장은 "세계가 ‘전기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AI 데이터센터뿐 아니라 전기차와 냉방 수요가 전력 소비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력의 안정적인 공급은 수입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배터리와 케이블, 변압기 등 한국이 경쟁력을 가진 제조업에도 새로운 수요가 생길 수 있다.
비롤 사무총장은 앞으로의 에너지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석유나 가스, 우라늄, 리튬이 아니라 ‘신뢰’라고 강조했다. 에너지 안보의 대상이 연료에서 공급망과 설비로 넓어지는 만큼 위기 때 실제로 작동하는 공급망과 전력 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