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핌 D. 리센코(왼쪽)가 1935년 소련 크렘린에서 조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농업 기술을 발표하고 있다. 스탈린(가장 오른쪽) 당시 공산당 인민위원장이 뒤에서 그의 발언을 듣고 있다.  위키피디아
트로핌 D. 리센코(왼쪽)가 1935년 소련 크렘린에서 조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농업 기술을 발표하고 있다. 스탈린(가장 오른쪽) 당시 공산당 인민위원장이 뒤에서 그의 발언을 듣고 있다. 위키피디아
1935년 소련 크렘린에서 개최된 집단농장 농민대회. 37세의 젊은 과학자 트로핌 D. 리센코는 이곳에서 획기적인 농업 기술을 발표한다. 겨울 밀을 인공적으로 저온 다습한 환경에 노출하는 ‘춘화 처리’ 과정을 거치기만 하면 수확량이 늘어난다는 것.

강연이 끝나자 스탈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리센코 동지, 브라보”라고 외쳤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박사 학위조차 없던 리센코의 성취는 스탈린이 원하는 이야기에 꼭 들어맞았다. 계급투쟁의 상징이 된 리센코는 소련 과학계의 핵심 지위를 꿰찬다.

[책마을] 과학은 시시때때로 정치에 휘둘려왔다
지바 사토시 일본 도호쿠대 대학원 교수는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된 <과학적으로 옳다는 착각>에서 이 장면을 두고 “사회와 과학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했다. 리센코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모두 과장되거나 조작·날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을 등에 업은 리센코의 농법은 소련 전역으로 확산했고, 그의 이론에 반대한 유전학자들은 ‘인민의 적’으로 몰렸다. 소련 과학계가 쌓아 올린 생물학 기반도 무너졌다. 1940년대 후반 대기근에도 리센코의 비과학적 농법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책은 이처럼 과학이 어떻게 정치와 편견에 휘둘리는지 끈질기게 탐구한다. 저자가 특히 경계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과 ‘가치 또는 가치판단’을 뒤섞는 일이다.

저자는 우생학을 둘러싼 리처드 도킨스의 문제의 발언을 짚는다. 도킨스는 2020년 SNS에 “우생학을 이념적·정치적·도덕적 이유에서 비난하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며 “소, 말, 돼지, 개, 심지어 장미에도 효과가 있는데, 어째서 인간에게는 효과가 없겠는가”라고 썼다.

도킨스에겐 나치 독일에서 참극으로 빚어진 우생학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저자는 우생학이 역사적으로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는 가치 판단과 특정 형질을 선택적으로 유전시키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지를 따지는 문제는 구별해야 한다는 도킨스의 주장에 주목한다.

다만 저자는 도킨스의 주장이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데서 논지를 끝마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품종개량이 가능하다’는 도킨스의 설명도 가치 중립적인 사실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형질을 우수하다고 볼 것인지부터 가치 판단이 개입한 게 아닐까.

저자는 ‘캄브리아기 대폭발’ ‘여섯 번째 대멸종’이라는 표현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울러 ‘생물 다양성=선’이라는 관점도 살핀다. 저자는 다양성이라는 표현은 1970년대까지는 거의 가치 중립적인 용어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 용어에 ‘선’이라는 가치관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논리는 다양성이라는 사실로부터 가치 판단을 도출해내므로 과학적 오류라는 것이다.

저자의 칼끝은 과학계 내부로도 향한다. 같은 연구를 반복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재현성 위기’,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분석을 반복하는 연구 관행 등이 과학에 대한 신뢰를 흔든다고 말한다.

해법은 자신의 가치관을 숨기지 않는 데 있다. 연구자가 어떤 문제의식과 의도에서 질문을 던졌는지 밝히고,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책 말미에 자신이 평생 어떤 연구를 해왔고, 어떤 인물들과 교류했는지 상세히 적었다.

저자는 리센코와 같은 괴물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과학의 결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라며 “과학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찰할 수 있는 마인드 셋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