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국정원, 경제안보 파수꾼 되려면
글로벌 안보의 문법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전투기와 미사일이 국가를 지켰다면 오늘날에는 반도체, 2차전지, 인공지능(AI) 같은 첨단기술과 핵심광물이 국가안보를 좌우한다. 첨단기술 하나를 잃으면 수십 년간 쌓은 산업 경쟁력이 흔들린다.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원자재 공급이 끊기면 공장이 멈추고 국민의 일상까지 흔들린다.

우리도 여러 차례 경제안보 충격을 경험했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국내 반도체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2021년 중국발 요소수 부족 사태 땐 화물차 운행 차질로 전국적인 물류 대란이 빚어졌다. 2013년에는 사이버 공격으로 주요 방송사와 금융기관의 전산망이 동시에 마비됐다. 경제와 안보를 더 이상 별개 영역으로 나눠 보기 어려운 이유다.

경제안보 위협은 피해가 드러나기 전에 시작된다. 외국 정부의 수출 통제 움직임과 경쟁국의 국내 핵심 인력 포섭이 대표적이다. 기술 탈취를 노린 합작법인 설립과 국가 지원을 받는 해외 해킹조직의 침투도 경계 대상이다. 기술이 유출되고 공급망이 끊긴 뒤에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위험 징후를 얼마나 일찍 포착하느냐가 경제안보의 성패를 가르는 이유다.

외국 정부의 정책 변화와 산업 전략을 국내 기업이 독자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반면 외국 경쟁 기업이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면 출발선부터 달라진다. 격투기 링에 한국 기업은 홀로 오르지만 상대 기업은 국가를 등에 업고 나선다. ‘1 대 2 시합’이나 다름없다.

개별 기업이 확보하기 힘든 해외 정보는 정보당국의 수집·분석 영역이다. 위험 징후를 기업과 적시에 공유하는 협력체계가 중요하다. 경제안보 전쟁은 개별 기업의 역량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국가적 과제다. 산업·외교·통상당국과 정보기관 간 역할 분담도 필수다. 그래야 기술 유출과 공급망 교란을 조기에 포착하고 기업의 선제 대응을 뒷받침할 수 있다.

이 같은 흐름에 맞춰 주요국은 경제안보를 국가정보기관 핵심 업무로 제도화하는 추세다. 미국은 국가정보국장실(ODNI)이 정보 공동체 활동을 조율한다. 이곳 산하의 경제안보·신흥기술국(OESET)은 핵심 기술과 광물 공급망을 겨냥한 해외 위협을 분석해 기업과 공유한다. 독일 정보기관인 연방헌법보호청(BfV)은 ‘경제 보호’를 공식 업무로 삼고 있다. 자국 기업의 기술과 노하우를 보호하며 산업스파이 등 해외 위협 정보를 제공한다. 일본도 경제안보추진법을 제정한 데 이어 지난 7월 내각정보조사실을 국가정보국으로 확대 개편했다. 제도와 역할은 달라도 경제·기술 정보를 국가안보 체계 안에서 다룬다는 방향은 같다.

우리에게도 정부와 기업이 정보를 공유하고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경제안보 원팀’ 체계가 시급하다. 기업의 생존과 국가 경쟁력이 걸린 문제다. 국가정보원법 개정도 이의 연장선에서 볼 필요가 있다. 개정 국정원법은 정보 수집·작성·배포 대상에 경제안보를 명시하고 있다. 경제안보 품목과 공급망 관련 정보를 국가 차원에서 다룰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려도 작지 않다. 시민단체는 ‘경제안보’와 ‘국가 배후 해킹 의심’의 범위가 모호해 기업과 개인에 대한 정보 수집이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과 민간인 사찰을 경험한 우리 사회로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다. 이런 우려는 권한 남용을 막을 제도적 안전장치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권한 부여와 남용 방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자동차가 속도를 내려면 성능 좋은 엔진뿐 아니라 믿을 만한 브레이크도 필요하다. 경제안보 임무에도 합당한 권한과 정교한 통제가 동시에 요구된다. 정보 수집 대상과 절차를 분명히 하고 목적 외 이용과 국내 정치 관여를 차단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국회와 외부 기관의 감독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책임과 통제 절차도 중요하다.

여야 합의로 마련된 국정원법 개정 취지를 살리는 길은 권한 확대를 넘어 국민이 신뢰할 감독 체계를 갖추는 데 있다. 국정원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아니라 경제안보의 파수꾼으로 거듭나려면 명확한 법적 근거 아래 절제된 권한과 엄격한 통제를 갖춘 시스템이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