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에서도 고급 주거지로 손꼽히는 ‘오처드 힐스’.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에서도 고급 주거지로 손꼽히는 ‘오처드 힐스’. 
글로벌 최상위 자산가는 여생을 보낼 집으로 어떤 곳을 선호할까. 이들에게 집은 자신을 증명하는 트로피가 아니라 세상에서 완벽하게 지워지도록 하는 은신처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뷰’에 지갑을 여는 한국의 주거 문화와 달리 글로벌 하이엔드 부동산시장에선 외부의 시선이 차단되는 ‘보이지 않을 권리’에 거액을 지불한다. ‘집이 어느 동네냐’는 질문 자체가 결례가 되는 세계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하마의 ‘라이포드 케이’다. 영화 ‘007’에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숀 코너리가 생의 마지막 30년을 보낸 이곳은 헨리 포드 2세, 아가 칸부터 헤지펀드 거물들까지 모여드는 억만장자의 대표적 은거지다. 수백만달러짜리 오션뷰 저택이 밀집해 있지만 바다 위 요트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안쪽 길도 완만하게 굽어 집의 정면이 노출되지 않도록 설계됐다. 기존 멤버의 초청으로만 운영되는 멤버십 제도는 ‘보이지 않을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게이트를 연다.

미국 서부의 게이티드 커뮤니티 역시 핵심은 은닉과 통제다. 캘리포니아 어바인의 ‘오처드 힐스’ 같은 고가 단독주택 단지는 방문자의 차량 번호판을 사전 등록 리스트와 대조하고, 예고 없는 방문자는 입주민과 통화하기 전까지 들어서지 못한다. 수영장은 높은 담장 안쪽에 숨고 외부의 소음과 불확실성은 철저히 차단된다. 입주민이 거액을 주고 사는 진짜 가치는 이 같은 ‘심리적 무장해제’다.

익명성의 시스템은 뉴욕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고전적인 코옵(co-op) 주택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겉은 아파트처럼 보이지만 입주하려면 기존 입주민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글로벌 재력가와 정계 거물, 팝스타조차 퇴짜를 맞기 일쑤다. ‘내 옆집에 누가 살지를 기존 입주민이 결정한다’는 논리다. 문패 없는 입구, 외부인을 거르는 도어맨, 전용 키 없이는 해당 층에 멈추지 않는 엘리베이터도 익명성을 지키는 장치다.

소더비인터내셔널리얼티의 럭셔리 아웃룩 리포트에 따르면 세계 럭셔리 에이전트의 81%가 “보안과 프라이버시가 매수 결정의 최우선 요소”라고 답했다. 가격과 수익률, 학군은 그 뒤다. 베벌리힐스의 에이전트가 담장 높이에 제한이 있거나 게이트 설치가 금지된 구역의 매물을 리스트에서 지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로벌 하이엔드 부동산의 진짜 플레이어는 눈에 보이는 집의 스펙과 높이를 사지 않는다. 세상에서 보이지 않을 익명성의 질과 수평적 은닉의 깊이를 산다.

고미연 글로벌프론티어에셋 대표(Wave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