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 발족식 오프닝하는 임주현 부회장
에페 발족식 오프닝하는 임주현 부회장
"한미약품의 신약 명가 시대는 끝났다." 2020년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제약·바이오업계에선 이런 평가가 나왔다. 갑작스런 창업주 별세에 승계 절차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상속세 재원 마련 과정에서 회사는 큰 경영권 부침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성장동력인 '연구개발(R&D)' 투자는 힘들 것이란 게 업계 평가였다.

창업주 장녀인 임주현 한미약품 부회장은 이런 업계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올 들어 잇따른 기술수출 성과를 보여주면서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한미약품의 신약 개발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는 일각의 지적에도 임 부회장은 R&D 투자만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약 개발이 목숨과도 같다'며 국내 개량신약 개발의 초석을 마련한 창업주 시대를 지나 한미약품이 '임주현 리더십' 시대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24일 한미약품이 로슈 자회사 제넨텍과 맺은 비만신약 기술수출 계약은 최대 23억 달러(3조1892억원)다. 계약금만 1억9000만 달러(2629억원)로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이 맺은 기술수출 계약 중 단일 물질 기준으론 최대다. HM17321(UCN2 유사체)는 근육량을 늘리면서도 체중 감량효과가 좋아 비만·대사 분야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혁신 신약 성과는 한미약품에 '임주현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0년 8월 세상을 떠난 임성기 창업주의 신약개발 업적을 뛰어 넘는 최대 규모 기술수출 계약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미약품의 비만·대사질환 혁신 프로젝트 H.O.P(Hanmi Obesity Pipeline)는 임 부회장이 직접 설계하고 추진해왔다. 단순 체중 감량을 넘어 체성분 개선, 근육 보존 및 증진, 복약 편의성 향상, 체중 감량 후 유지·관리까지 비만 전주기 치료 솔루션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한미약품은 이 프로젝트에 따라 한국형 비만약 '에페(에페글레나타이드)'와 HM15275, HM17321, HM500197 등 6개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에페는 올해 출시를 앞두고 있다.

잇딴 한미약품의 기술수출 성과를 위해 임 부회장은 내부에서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6월 한미약품이 미국 일라이릴리에 기술수출한 희소질환치료제 '소네페글루타이드'가 대표적이다.

희소질환 신약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시장성이 명확하지 않다. 이 때문에 일부 대주주 측에선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게 피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비용 대비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임 부회장은 이런 내부 압력에도 뚝심있게 버티면서 신약 개발 파트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요하는 연구파트 직원을 격려하고 필요한 투자는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도 임 부회장의 몫이었다. 한미약품의 홈페이지에 글로벌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직원들의 연구 성과를 전면에 내세우도록 한 것도 임 부회장의 요청이었다.

업체 관계자는 "임 부회장은 평소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일에 전념하는 스타일의 업무형 리더"라며 "외부에 이런 리더십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라고 했다.

한미약품의 독자 플랫폼 기술인 '랩스커버리'는 약효 지속시간을 늘려 투약 편의성과 치료 효율을 개선해주는 플랫폼 기술이다. 20여년간 축적한 연구개발 자산도 에페 등 여러 신약 후보물질에 적용되면서 한미약품의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했다.

업체 관계자는 "임성기 선대회장 타계 후 흔들림 없이 신약개발에 집중하고 성과를 낸 배경엔 임 부회장의 지원이란 버팀목이 있었다"며 "구성원이 업무에 집중하도록 뒤에서 지원하고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성과를 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