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의 꽃' 와인에 힘주는 항공사…일등석이 더 특별해지는 마법
와인 한 잔엔 시간이 담긴다. 포도는 계절을 머금고, 오크통은 세월을 품는다. 땅에서 완성된 와인 한 병이 고도 1만m 상공에 오르기까지는 또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기압과 습도로 인해 와인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항공사는 최상의 와인 한 잔을 내놓기 위해 수년을 준비한다. 한 병에 70만원을 호가하는 샴페인부터 희귀 빈티지까지. 기내식 와인은 항공사의 철학과 품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준이다.

70만원 샴페인까지…일등석 ‘와인 전쟁’

'기내식의 꽃' 와인에 힘주는 항공사…일등석이 더 특별해지는 마법
한정된 기내 공간에서 마시는 최상의 와인 한 잔. 여행의 만족도와 항공사의 이미지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무기다. 에미레이트항공은 항공사 중 유일하게 퍼스트클래스에서 ‘돔 페리뇽 로제 빈티지 2009’를 내놓는다. 해외 판매가가 한 병에 60만~70만원에 달하는 세계 정상급 로제 샴페인이다. 일등석 승객은 별도 비용 없이 캐비아와 함께 이 와인을 맛볼 수 있다. ‘아시아 금융 허브’인 싱가포르를 오가는 싱가포르항공은 일등석과 스위트 승객에게 병당 수십만원에 달하는 ‘크룩 그랑 퀴베’와 ‘테탱저 콩트 드 샹파뉴’ 등 최고급 샴페인을 내놓는다. 2024년 12월부터는 항공사 중 유일하게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 2015’도 서비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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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항공사도 와인 서비스에 공들인 지 오래다. 대한항공은 일등석 20종을 포함해 총 61종의 와인을 노선과 기내식에 맞춰 번갈아 싣는다. 지난달 열린 항공사 와인 경연대회 ‘셀러스 인 더 스카이 어워즈 2026’에서는 대한항공의 일등석 디저트 와인 ‘샤토 기로 2022’가 해당 부문 1위에 올랐다. 일등석 레드 와인과 프레스티지석 샴페인도 각각 3위를 차지했다.

900종 블라인드 시음…50종만 기내로

기내에 실릴 와인 한 병을 고르는 과정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세계적인 소믈리에와 와인 전문가가 수백 종의 후보를 시음하고 산지와 품종, 기내식과의 궁합까지 세심히 따진다. 유명하거나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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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은 2019년부터 ‘세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인 마르크 알메르트와 함께 세계 각지의 와인 약 900종을 조사했다. 3년에 걸친 검토 끝에 후보를 150종으로 압축한 뒤 2022년 10월 이틀간 인천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최종 평가를 진행했다. 알메르트와 이상준 소믈리에는 이틀 동안 와인의 이름을 가린 채 맛과 향을 비교하고 하나하나 점수를 매겼다. 그렇게 900종 가운데 50종만 대한항공의 새 와인으로 낙점했다. 기내식과의 조화도 고려했다. 불고기나 갈비처럼 양념이 강한 한식에는 과실 향이 풍부한 와인을, 매운 음식에는 산미와 단맛이 균형을 이룬 와인을 페어링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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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항공의 심사도 만만치 않다. 마스터오브와인(MW)을 포함한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 3명이 매년 1000종이 넘는 와인을 라벨을 가린 채 심사한다. 색과 투명도, 향과 맛은 물론 습도가 낮은 기내에서 풍미가 살아나는지까지 평가한다. 와인 목록은 2~3개월마다 바뀐다. 유명 샴페인 하우스 제품뿐 아니라 소규모 양조장의 샴페인까지 와인 저장고에 채워진다.

항공사들이 이처럼 까다로운 선별 과정을 거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상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와인이 반드시 기내에서도 최고 맛을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0년 뒤 내놓을 와인을 미리 산다

'기내식의 꽃' 와인에 힘주는 항공사…일등석이 더 특별해지는 마법
좋은 와인을 둘러싼 항공사의 ‘사재기’ 경쟁도 치열하다. 호주 콴타스항공은 자국 와인업계의 대표적인 ‘큰손’이다. 개럿 에번스 전 콴타스인터내셔널 최고경영자(CEO)는 콴타스를 “호주에서 세 번째로 와인을 많이 구매하는 기업”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에미레이트항공은 수년 뒤 내놓을 와인을 미리 확보한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고급 와인을 숙성이 끝나기 전에 계약하는 ‘앙 프리뫼르’ 방식으로 유명하다. 오크통에서 숙성되고 있는 와인을 미리 고른 뒤 가져와 가장 맛있어질 때까지 보관한다. 비즈니스석용은 8~10년, 일등석용은 12~15년간 프랑스의 온도조절 창고에서 숙성시킨다. 2023년 말 기준 에미레이트항공이 보관 중인 와인은 약 600만 병에 달한다. 이 가운데 일부는 2037년에야 기내에서 제공된다.

정성껏 고르고 숙성시킨 와인을 어떻게 내놓는지도 중요하다. 에미레이트항공은 객실승무원에게 와인의 산지와 제조 과정, 기내식과의 궁합, 와인 따르는 법 등을 가르친다. 싱가포르항공은 일부 승무원을 ‘에어 소믈리에’로 양성한다. 국제 와인 자격인 WSET 레벨3를 취득하고 6개월간 사내 교육과 평가를 통과한 승무원에게 전용 배지를 달아준다.

송준영 기자 s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