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민선 '잔설', 2026, 눈 사진 위에 화학약품, 97 x 108 cm. 작가 제공
이해민선 '잔설', 2026, 눈 사진 위에 화학약품, 97 x 108 cm. 작가 제공
질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익숙한 방식이다. 현실을 이해하는 명료한 도구여서다. 그러나 삶은 때로 질서의 테두리를 벗어난 미세한 틈에서 드러날 때도 있다. ‘잔설’이라 부르는 녹다 남은 눈이 그렇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응당 자취를 감추는 게 순리지만, 응달에서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먼지와 얼룩을 품은 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작가 이해민선은 이 잔설을 보고 “소멸에 저항하고 형상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런 그의 생각은 신작 ‘잔설’에 표현됐다. 사진이 흰색은 인화하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해 인화지 흰색을 그대로 남기고선 그 주변에 먼지와 얼룩, 녹아내린 자국을 그렸다. 눈은 직접 묘사되지 않지만, 주변 흔적에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계속 이어지는 시간을 보여주는 셈이다.

지금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는 ‘잔설’을 포함해 나름의 방법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탐구하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지난 24일 개막한 ‘올해의 작가상 2026’ 전시에서다. 전시를 기획한 박덕선 학예연구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질서를 완결한 형태로 보지 않고, 미세한 틈과 균열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색으로 가시화한 작품들로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올해의 작가상 2026' 전시 전경. MMCA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올해의 작가상 2026' 전시 전경. MMCA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이 SBS문화재단과 2012년부터 매년 열고 있는 ‘올해의 작가상’은 국내 대표 현대미술 작가 후원 프로그램이다. 매년 작가 4인(팀)을 선정해 신작 제작과 전시 지원, 해외 프로젝트를 후원한다. 갈라 포라스-김, 오민, 김아영, 백현진, 함경아 등 실험적인 담론을 제시한 작가들이 거쳐 갔다.

올해는 이해민선, 이정우, 전현선, 홍진훤 작가가 선정됐다. 1970~1980년대생인 이들은 회화, 영상, 인공지능(AI) 등 각기 다른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 활동을 지속해왔다.

이정우는 AI와 데이터 기반 기술이 현실과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가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다. 해방 후 독립과 자유를 주제로 한 장편영화 ‘자유만세’(1946)를 소재로 했다. 감독의 친일 경력, 주연 배우의 월북, 급격한 사회 변화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50분 분량만 남은 영화의 사라진 장면을 생성 AI로 재구성했다. 검열과 왜곡, 편향이 오늘날의 기술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반복되는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현선 '토끼도 굴을 두 개 판다', 2026, 캔버스에 수채, 200 × 200 cm. 작가 제공
전현선 '토끼도 굴을 두 개 판다', 2026, 캔버스에 수채, 200 × 200 cm. 작가 제공
회화를 공간적 경험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해 온 전현선은 ‘토끼도 굴을 두 개 판다’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를 위해 제작한 대형 회화 제목인 동시에 함께 설치된 조각, 영상 등 기존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교토삼굴’ 고사처럼 연약한 존재일수록 단일 선택에 스스로를 고정하기보다, 여러 가능성과 대안을 품은 채 살아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커다란 정사각 캔버스 30점으로 이뤄진 그의 대형 작품은 암벽 등반장처럼 화면이 전면으로 15도가량 기울어 있다. 관람객이 암벽을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고민하는 등반가처럼 각자의 시각적 경로를 이어가도록 만든다. 그는 “정면에서 보면 평면, 옆에서 보면 입체인 중간자적 존재”로 작품을 소개했다.

사진, 영화, 웹프로그래밍을 활용하는 홍진훤은 신작 영상 ‘암순응’과 ‘명순응’을 선보였다.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세계를 가시와 비가시로 나눠 이미지를 권력화하고, “빛이 있으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동일시 잘못된 믿음을 만들어냈음을 성찰하는 작품이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진행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 기간 중 관람객이 참여하는 다채로운 공개 좌담회와 전문가 2차 심사를 거쳐 오는 10월 최종 수상자인 ‘2026 올해의 작가’를 발표한다.
올해의 작가상 2026 참여작가 단체 사진. MMCA 제공
올해의 작가상 2026 참여작가 단체 사진. MMCA 제공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