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에르메스 매장. 사진=한경DB
프랑스 파리 에르메스 매장. 사진=한경DB
명품업계의 오랜 불문율 가운데 하나는 ‘남은 물건을 싸게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백만원짜리 가방이나 옷이 시즌이 지났다는 이유로 싼 값에 풀리면 브랜드가 쌓아온 하이엔드 이미지나 희소성이 훼손될 수 있다. 일부 럭셔리 브랜드가 재고를 할인 판매하는 대신 폐기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앞으로는 이같은 불문율이 깨질지 모른다. 유럽연합(EU)이 기업이 판매하지 못한 의류와 신발, 의류 액세서리 등을 폐기하는 것을 금지하면서다. 샤넬이나 루이비통, 디올, 구찌, 프라다 등 유럽 주요 명품 기업이 사실상 모두 포함된다. 명품업계의 생산과 할인, 재고 처리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명품은 안 팔린 가방 왜 소각할까

업계에 따르면 EU의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에 따라 대기업은 이달부터 미판매 의류와 의류 액세서리, 신발을 원칙적으로 파기할 수 없다. 중견기업은 2030년 7월 19일부터 이 규제안을 적용받는다. 제품이 안전이나 건강에 위험을 일으키거나 위조품인 경우,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경우 등에는 예외가 인정된다. 유럽에선 판매 목적으로 공급되는 섬유제품 가운데 매년 4~9%, 약 26만4000~59만4000t이 사용되기 전에 폐기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서울 시내 샤넬 매장 진열창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 시내 샤넬 매장 진열창 모습. 사진=연합뉴스
규제가 시행되면서 주목받은 브랜드는 샤넬이다. 최근 공개된 법원 자료에 따르면 샤넬은 홍콩에서 6개월마다 미판매 제품 1만~2만점을 폐기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샤넬은 FT에 “법정에서 언급된 수치는 현재의 글로벌 운영 방식을 반영하지 않았다”며 “판매가 어려운 제품을 2019년 설립한 재활용 계열사 ‘라틀리에 데 마티에르’를 통해 처리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2019년 설립된 라틀리에 데 마티에르는 미판매 제품과 생산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을 해체·분류해 가죽과 금속, 섬유 등 소재를 회수하는 역할을 한다.

명품업체 입장에서 재고는 일반 패션기업보다 까다로운 문제다. 예컨대 브랜드가 1500만원짜리 가방을 시즌이 지나고 몇 달 뒤 700만원에 할인 판매했다고 가정해보자. 새로운 소비자는 최대한 정가 구매를 미루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1500만원을 주고 가방을 산 기존 고객이 손해를 봤다고 느끼며 반발하는 건 더 큰 문제다. 브랜드의 희소성과 가격 신뢰도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품 기업들은 생산량 자체를 제한하거나 재고를 장기간 보관하고, 아울렛을 운영하더라도 정규 매장 제품과 상품 구성을 분리해왔다. 일부 제품은 시장에 다시 내놓지 않고 폐기하는 방식을 택한 배경이다.

샤넬·루이비통 아울렛 생길까

재고를 두고 명품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지만, 일반 대중 소비자 입장에선 “샤넬이나 루이비통 등 유명 명품 제품도 아울렛에서 싸게 살 수 있게 되느냐”는 것이 관심사일 것. 하지만 하이엔드 명품의 공식 아울렛이 곧장 생겨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듯 하다. 대신 유통망과 가격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샤넬, 루이비통 등의 브랜드는 대규모 할인 판매보다 생산량 축소와 수요 예측 고도화, 장기 보관, 소재 회수 등을 우선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 시내 한 루이비통 매장의 모습. 사진=뉴스1
서울 시내 한 루이비통 매장의 모습. 사진=뉴스1
루이비통과 디올을 운영하는 명품 기업 LVMH는 남은 소재를 재유통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그룹이 2021년 출범시킨 ‘노나소스’는 LVMH 산하 패션·가죽제품 브랜드에 남아 있던 원단과 가죽을 외부 디자이너와 브랜드에 판매하는 플랫폼이다. 노나소스는 출범 이후 25개가 넘는 브랜드로부터 확보한 소재 약 2만종을 유통했고, 2026년 기준 50개국에서 2500여 고객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완제품을 할인해 파는 대신 생산 과정에서 남은 원단과 가죽을 원료 단계에서 순환시키는 방식이다.

이미 아울렛 사업을 하는 브랜드도 고민이 있다. 재고를 아울렛으로 넘기는 비중이 높아질 수록 소비자가 해당 브랜드를 ‘정가보다 할인 가격에 사는 브랜드’로 인식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베르사체가 대표적이다. 이에 지난해 베르사체를 인수한 프라다는 아울렛과 할인 판매 의존도를 낮추는 브랜드 재정비 작업에 착수했다. 베르사체 매출에서 팩토리 아울렛과 할인 채널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를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버버리도 상품 매입과 재고를 줄이며 브랜드 정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버버리의 재고(지난해 9월 기준)는 전년 동기보다 24% 감소했다. 회사는 상품 구성을 단순화하고 구매 물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재고와 할인 판매를 통제하고 있다.

"싸게 팔면 안 되는데…버릴 수도 없어"

최근 명품시장 침체는 재고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 개인 명품 시장은 2024년 3640억유로에서 2025년 3580억유로로 약 2% 감소했다. 전 세계 명품 소비자 수는 약 3억3000만명으로, 최근 2년 사이 6000만~7000만명 감소한 것으로 분석됐다. 코로나19 이후 누적된 가격 인상으로 중산층과 입문 소비자들이 시장에서 이탈한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2025년에는 전체 명품 상품의 최대 40%가 아울렛이나 가격 인하 등 어떤 형태로든 할인 판매된 것으로 추산됐다. 수요 둔화와 과잉 재고가 브랜드의 할인 채널 의존도를 높였다는 의미다.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거리 명품 매장. 사진=한경DB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거리 명품 매장. 사진=한경DB
결국 EU 규제는 명품업계에 단순한 환경 규제를 넘어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라는 사업모델 자체를 다시 설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남은 상품을 폐기로 처리할 수 없게 되면서 처음부터 수요에 가까운 물량을 생산하고 정가 판매율을 높이는 능력이 중요해질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실시간 재고 추적과 수요 예측, 점포·창고 간 상품 배분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소량 생산·추가 생산 체계를 강화하는 움직임도 빨라질 전망이다. FT 역시 이번 규제로 명품기업들이 보관·수선·재활용 비용을 늘릴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