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 4월 기준 한국인과 해외 한인 창업가가 미국에서 본사를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최소 193개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조사한 결과다. 벤처캐피털(VC)의 투자를 받은 기업으로만 한정했다. 미국에서 창업에 나선 이른바 ‘본 글로벌(born global)’ 스타트업은 실제 더 많을 것이라는 얘기다.

본 글로벌 전략은 젊은 기업일수록 더 과감하다. 미국에 법인을 둔 193개 기업을 창업 연도별로 분석하면 2024년 설립된 기업은 30개로 2021년(8개)보다 훨씬 많다. 창업 생태계 허브인 디캠프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에서도 해외에 본사를 둔 기업은 22개인데, 이 중 14개가 2023년 이후 설립됐다. 디캠프 관계자는 “기회의 땅인 미국에서 창업하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국내 창업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하던 데서 시선을 넓혀 미국 등 해외 현지 네트워크와 현지 전문 파트너를 확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후한 평가’에 미국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 같은 움직임은 2~3년 전부터 본격화했다. ‘플립(flip)’ 바람이 불어서다. 플립이란 한국에 법인을 설립한 기업이 미국 등으로 본사를 옮기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플립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기업 밸류에이션(기업가치 평가) 때문이다. 국내 스타트업이 많이 도전하는 정보기술(IT) 사업 모델은 소프트웨어 본고장인 미국에서 더 후한 평가를 받는 게 현실이다.

인공지능(AI) 모델 경량화 기업 클리카가 본보기다. 2021년 한국에 법인을 세운 클리카는 지난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사갔다. 자신들이 개발한 AI 경량화 솔루션 기술은 국내 시장이 초기인 만큼 기업 평가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클리카는 2024년 미국으로 법인을 옮긴 뒤 액센츄어벤처스, 딥테크 투자사 마일마크캐피털, 동남아시아 VC 골든게이트벤처스 등에서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멀티모달 영상 이해 AI 스타트업 트웰브랩스도 글로벌 무대 공략과 대규모 투자 유치를 위해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해 성공을 거둔 대표적 플립 사례로 꼽힌다. 트웰브랩스는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한국 스타트업 최초로 엔비디아의 전략적 투자를 유치하고 글로벌 톱티어 VC의 러브콜을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창업부터 글로벌 겨냥

이런 분위기가 팽배하다 보니 아예 설립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웹, 모바일, 플랫폼 시대에는 카카오, 네이버, 토스 등과 같은 서비스가 안방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국경이 무의미한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 솔루션, AI 응용 서비스 등에 도전하는 기업은 글로벌 차원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수년간 머신러닝·AI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며 열린 광활한 시장도 창업가의 글로벌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요소다.

언어 장벽을 뛰어넘어 전 세계 기업을 고객으로 끌어들이며 수천억원대 매출과 함께 기업가치가 10억달러를 넘는 유니콘 기업 반열에 오른 몰로코, 센드버드가 대표적 사례다. AI 기반 맞춤형 정신 건강 관리 솔루션으로 유니콘 기업으로 인정받은 스프링헬스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일단 미국 법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글로벌 사업 난도가 낮아진다”며 “투자 유치도 있지만, 어느 나라 기업이냐에 따라 현지 네트워크 구축, 거래처 접촉, 거래 성사 확률 자체가 달라진다”고 털어놨다.

한국의 규제도 한몫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얼바인에 본사를 둔 위성항법시스템(GPS) 기반 가족 안심 서비스 기업 아이쉐어링의 주용재 대표는 “본사를 미국에 두지 않았다면 민감한 데이터를 가공한 서비스를 유럽 등지에 판매하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라며 “만약 한국 기업이었다면 같은 계약 구조여도 필요한 과정이 더 많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기업이 미국 법인이라는 후광효과를 기대하고 미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역(逆)플립’ 사례도

해외 본사 설립 물결을 놓고 신중론도 적지 않다. 기업이 처한 상황과 사업 방향에 따라 본 글로벌 전략이 되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해외 창업 생태계는 투자 유치에 성공하면 막대한 투자금이 쏟아지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 소수 기업에만 관심과 자본이 쏠린다. 생태계 양극화가 뚜렷하다는 얘기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공동대표는 “창업 생태계의 초기 지원이 부족해 창업자가 인고의 시간을 홀로 버텨야 하는 미국에 비해 국내 생태계는 극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후한 편”이라며 “팁스(TIPS) 같은 기술 창업 프로그램을 활용하기에도 용이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창업은 여러 장점이 있지만 임차 및 인력 채용 비용이 막대해 사업·인력 구조에 따라 한국에 본사를 두는 게 유리할 수 있으며, 실제 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역플립 사례가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VC 및 창업 지원 기관은 본사를 세울 위치를 정하기에 앞서 목표 고객과 투자 유치 타이밍 등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VC 관계자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고객이 어디에 있는가’이며 목표 시장이 한국이라면 한국에 있는 게 유리할 수 있다”며 “창업 국가를 정하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선택이 아니라 제품 개발과 시장 전략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강조했다.

허진 기자 h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