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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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철학자 마이클 폴리니의 이 문장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업들이 문서나 매뉴얼을 넘어 직원들의 ‘암묵지’를 인공지능(AI)에 학습시키기 시작하면서다. 오랜 경험으로 쌓인 직원의 직관과 판단, 업무감각을 얼마나 AI에 효과적으로 이식하느냐가 AI 시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반면 직원들에게 암묵지는 협상력이 되고 있다. 자신의 노하우를 AI에 이전하는 순간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동시에 이런 경험은 기업이 AI를 고도화하는 데 필수 자산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 새로운 노사관계가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암묵지 학습시키는 기업들

사진=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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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는 문서나 매뉴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 기반의 지식을 의미한다. 숙련된 영업사원이 고객의 반응을 읽는 감각이나 투자 전문가의 직관, 장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업들은 그동안 이런 암묵지를 사람의 경험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업무에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AI가 조직의 맥락을 이해하고 사람 수준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결국 직원이 축적한 경험까지 학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숙련자가 오랜 시간을 거쳐 체득한 판단과 직관은 문서나 매뉴얼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암묵지는 인간조차 스스로 설명하기 어렵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암묵지를 인간이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AI가 암묵지를 배울 수 있다고 봤다. AI는 인간이 설명하지 못하는 데이터 속 패턴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스타트업 모뉴멘털AI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기업은 벽돌을 쌓는 로봇을 개발하기 위해 숙련된 벽돌공들을 인터뷰했지만 “원래 이렇게 한다”는 답변 외에는 별다른 설명을 듣지 못했다. 대신 수백 시간의 작업 영상을 분석한 결과 벽돌을 올릴 때 손을 미세하게 흔드는 동작이 접착력을 높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은 설명하지 못했지만 데이터는 암묵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후 이 동작은 로봇 설계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금융업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타났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는 GPT와 클로드, 제미나이 등 최신 모델에 투자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뉴스와 금융자료 분석 업무를 지시했다. 그러나 정확도는 약 50% 수준에 그쳤다. 프롬프트를 아무리 정교하게 바꿔도 성능 개선은 제한적이었다.

이후 브리지워터는 내부 전문가들의 판단과 축적된 내부 데이터를 활용해 AI 모델을 직접 추가 학습시켰다. 그 결과 맞춤형 AI 모델의 정확도를 85%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브리지워터 측은 “적문가의 직관을 하나의 고정된 프롬프트에 담으려 하기보다 모델이 스스로 판단력을 갖도록 학습시켰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전문가들이 AI의 결과물을 평가하고 피드백을 제공하는 방식도 주목받고 있다. 정답이 없는 디자인이나 투자 판단 같은 영역에서는 전문가의 평가 자체가 AI를 학습시키는 핵심 데이터가 되고 있는 셈이다.

직원에게는 암묵지가 경쟁력

문제는 암묵지가 곧 노동자의 경쟁력이라는 점이다. 직원 입장에서는 수년간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AI에 모두 이전할 경우 언젠가는 그 AI가 자신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포드는 자동 품질 관리 시스템 성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베테랑 엔지니어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를 두고 “인간이 기계를 이긴 사례”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하지만 FT는 “엔지니어는 기계를 대신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다”며 “그들의 역할은 기계를 더 똑똑하게 학습시키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 같은 논쟁은 100여 년 전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추진한 ‘과학적 관리법’과도 닮아 있다는 게 FT의 해석이다. 당시 테일러는 숙련공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해 표준 작업 방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율성과 재량권을 빼앗긴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AI 시대 역시 직원들의 지식을 기업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갈등이 반복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FT는 문서화하기 어려운 암묵지를 축적한 직원의 협상력이 한층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AI를 고도화하려면 숙련된 직원들의 경험과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해외 노동조합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새로운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과 직원 간 신뢰의 중요성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직원들이 AI 개발에 협력하려면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제공한 대가를 공정하게 보상받고 AI가 창출한 성과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 반대로 AI가 자신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불신이 커질 경우 협력은 쉽지 않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결국 AI 경쟁의 다음 단계는 단순히 더 뛰어난 모델을 확보하는 데 있지 않다고 보고 있다. 기업 내부의 암묵지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AI에 학습시키고, 그 과정에서 직원들의 신뢰와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가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노사관계와 조직문화 역시 기업 경쟁력의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명현 기자 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