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열린 '범죄피해자가 바라보는 바람직한 형사소송법 개정방향 토론회'에서 의원들이 범죄 피해자 사례 증언을 듣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23일 열린 '범죄피해자가 바라보는 바람직한 형사소송법 개정방향 토론회'에서 의원들이 범죄 피해자 사례 증언을 듣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강간살인미수로 징역 20년 판결을 받은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저는 보완수사권이 살아 있을 때 피해를 당한 '운 좋은 피해자'입니다."

김진주 씨(가명)가 단상 위에 오르자 토론회장엔 적막이 흘렀다.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범죄피해자가 바라보는 바람직한 형사소송법 개정 방향' 토론회를 주최한 홍기원·남인순·박희승·곽상언 민주당 의원은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김 씨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 개혁으로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재판은 다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저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김 씨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2022년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다. 이날 김 씨의 발표에 따르면 경찰은 초반 사건을 단순 상해로 접수했다. 김 씨는 "기억을 잃은 제게 성범죄를 당한 것 같냐고 묻고 제가 아마 아닐 거라고 하자 그냥 넘어갔다"며 "제가 입고 있던 바지도, 속옷도 성범죄와 관련된 감식 없이 캐비닛에 넣어 두었다"고 말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검사의 보완수사가 시작되면서다. 가해자는 성범죄를 일절 부인했지만 검찰은 보완 수사로 청바지 안쪽에서 가해자의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형량은 20년으로 늘었다. 김 씨는 "검사의 보완수사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제 사건을 단순 중상해로 알고 살았을 것"이라며 "형량은 훨씬 가벼웠을 것이고 어쩌면 가해자는 이미 출소해 제 곁을 지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스토킹 및 디지털 성폭력 범죄 피해자인 곽아람 조선일보 기자는 격양된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갔다. 곽 기자는 "보완수사권 폐지는 사회적 약자만 문제가 아니다. 저는 사회적 약자가 아닌데도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라며 "지금 이 문제는 여기 계시는 의원님들, 그리고 기자분들, 전 국민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곽 기자는 일면식도 없는 50대 남성으로부터 지속적인 범죄 피해를 당했다.

곽 기자는 "2020년 검찰개혁 얘기가 있을 때 솔직히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정신 차려보니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피해자가 돼 있었다"며 "정말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고 분노했다. 피의자는 스토킹과 디지털 성폭력 뿐만 아니라 커다란 도끼가 보이는 영상으로 협박을 하거나 음란 편지까지 보내는 등 각양각색의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곽 기자는 "2021년 가해자를 처음 고소했을 때, 가해자가 저의 특정 신체 부위를 언급하면서 '당장 빨고 싶을 정도로 섹시하다'는 내용의 글을 여러 차례 올렸다"며 "그런데 경찰은 '섹시하다는 것의 사전적 정의는 성적 매력이 있다는 뜻이라서 고소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모욕적 언사에 해당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사건을 불송치했다. 상황을 바꾼 것은 검찰이었다. 검사는 사건을 재검토해 모욕죄로 기소했고, 법원은 결국 유죄 판결을 내렸다.

고통은 피의자가 고소에 대한 보복으로 뉴스 사이트의 댓글과 자신의 블로그에 통신매체 음란행위를 하면서 반복됐다. 곽 기자는 "경찰은 이번에도 '누군가가 뉴스 기사를 찾아 댓글을 읽거나 피의자 블로그를 검색해서 들어가지 않는 한 인식하기 어렵다'며 불송치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불송치 사건은 피해자가 이의신청을 하지 않으면 검찰의 보완수사가 불가능하다. 곽 기자는 "이의 신청은 변호사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며 "그냥 검찰에 전건송치를 하면 될 일을 왜 피해자가 심리적 고통을 겪어가며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박선영 황산 테러 사건 피해자(가명), 집단 성폭력 사건 피해자 등도 대부분 비슷한 의견을 제기했다. 보완수사권 예외적 허용 법안의 대표발의자이자 토론회를 주최한 홍 의원은 "형사사법 제도는 전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라며 "제가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것은 오직 피해자와 국민 보호를 두텁게 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인 곽 의원도 "제도를 만드는 일은 개인적인 원한을 푸는 일이 아니다"라며 "제도를 통해 많은 국민들이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원내지도부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보완수사권 완전 폐지 입장을 밝혔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