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필하모닉 입단한 바이올리니스트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LA필하모닉 입단한 바이올리니스트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결과를 미리 걱정하기보다 기회가 있을 때 무엇이든 도전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LA필)에 반가운 얼굴이 합류했다. 제1바이올린 단원으로 입단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안정민(27)이다. 안정민의 합류로 LA필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음악가는 8명이 됐다.

안정민은 지난 20일 LA필에 입단했다. 이튿날인 21일에는 곧바로 첫 무대에 올랐다. 장소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1만7500석 규모 야외공연장 할리우드볼. LA필이 100년 넘게 여름 시즌 공연을 열어온 대표적인 야외무대다.
할리우드볼에서 열린 LA필하모닉과 히사이시 조의 영화음악 콘서트 포스터 / 사진 출처. 해리슨 패럿 공식 홈페이지
할리우드볼에서 열린 LA필하모닉과 히사이시 조의 영화음악 콘서트 포스터 / 사진 출처. 해리슨 패럿 공식 홈페이지
그의 LA필 첫 공연은 일본 영화음악의 거장 히사이시 조가 직접 지휘한 영화음악 콘서트였다. '원령공주'와 '이웃집 토토로', '벼랑 위의 포뇨' 등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위해 히사이시가 작곡한 음악이 연주됐다. 공연은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간 열렸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천천히 실감할 여유는 없었다. 입단하자마자 새로운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고 1만명이 넘는 관객 앞에 서야 했다.

2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안정민은 "입단 직후 곧바로 공연이 있어 준비 기간이 상당히 빠듯했다"며 "합격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정말 내가 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정민이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LA필의 첫인상은 '젊고 자유로운 에너지'였다. "비교적 젊은 단원들이 많아서인지 활기차고 자유로운 기운이 느껴졌어요. 소리는 풍성하면서도 선명했습니다."

그는 LA필에 대해 "각 파트가 뚜렷한 개성을 지니면서 전체적으로는 생동감 있는 하나의 소리를 만드는 악단"으로 정의했다.
LA필하모닉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제 1바이올린 단원 안정민 / 이미지 출처. LA필하모닉 홈페이지 캡처.
LA필하모닉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제 1바이올린 단원 안정민 / 이미지 출처. LA필하모닉 홈페이지 캡처.
뒤늦게 발견한 오디션 공고와 당찬 도전

안정민은 처음부터 LA필 입단을 목표로 오디션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공고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오디션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준비해야 할 곡도 많았다. 학기가 막 시작된 데다 다른 오디션에도 지원한 상태였다.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더 많았지만 그는 일단 도전하기로 했다.

"모든 레퍼토리를 한꺼번에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도 결과부터 걱정하기보다 기회가 있을 때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지원했습니다."

남는 시간은 거의 모두 오디션 준비에 썼다. 처음 연주하는 작품도 많았다. 길고 낯선 곡은 음원을 반복해서 듣고 악보를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준비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깊이 집중해 제 연주를 돌아볼 수 있었어요. 제 음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가 합격의 승부처로 꼽은 곡은 슈만 교향곡 2번의 2악장 스케르초다. 빠른 음형이 쉼 없이 이어져 바이올린 연주자의 기교와 리듬감, 집중력을 동시에 시험하는 대표적인 오케스트라 오디션 발췌곡(액섭)이다.

"오디션이 모두 끝난 뒤 현장 담당자가 제 연주를 듣고 동료에게 '어메이징하다'고 보낸 문자 화면을 보여줬어요. 제 오디션을 본 현장 스태프들이 제가 예상했다는 이야기도 해줬습니다. 제 장점이 슈만에서 잘 전달된 게 아닐까 생각해요."
21일 로스엔젤레스 할리우드볼에서 히사이시 조 영화음악콘서트에 출연한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21일 로스엔젤레스 할리우드볼에서 히사이시 조 영화음악콘서트에 출연한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악장 경험으로 배운 '듣는 법'

안정민은 2024년과 2025년 탱글우드 뮤직센터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맡았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연주자들을 이끈 당시의 경험은 LA필 오디션에서도 자산이 됐다.

"악장은 단순히 앞에서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휘자와 단원들을 연결하고 오케스트라 전체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가는 역할입니다."

악장을 맡으면서 자신의 연주뿐 아니라 주변의 소리를 넓게 듣는 법을 배웠다. 리허설과 공연 중에는 순간마다 빠르게 판단하고 음악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오케스트라 안에서 더 적극적으로 듣고 반응하는 법을 배웠어요. 시야가 넓어졌고 LA필 오디션에서도 자신감을 갖고 제 음악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와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바이올린 독주자로도 꾸준히 활동해온 그가 오케스트라에 끌린 이유는 '함께 만드는 소리'에 있다.

"독주 무대에서 제 음악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도 좋아해요. 하지만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연주자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하나의 큰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독주와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1999년생인 안정민은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예비예술인 과정을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예술영재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 김현미를 사사한 뒤 예일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타이 머레이에게 배웠다.

국내에서 금호영재콘서트 무대에 올랐고 현대차 정몽구 재단 온드림 문화예술 장학생으로도 활동했다. 시카고 심포니와 보스턴 심포니, 서울시립교향악단 등에서 객원 단원으로 활동하며 연주 경험을 쌓았다.

그는 "김현미 교수님께는 음악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감각과 연주자의 기본자세를 배웠고, 머레이 선생님께는 소리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과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익혔어요"라며 한국과 미국의 두 스승에게 감사를 전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과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과 안정민 / 아티스트 제공.
두다멜의 마지막, 하딩의 시작

안정민은 LA필이 중요한 전환기를 맞은 시점에 합류했다. 베네수엘라 출신 음악감독 구스타보 두다멜이 오는 8월 임기를 마친다. 2009년부터 17년간 LA필을 이끌어온 그는 뉴욕 필하모닉으로 자리를 옮긴다. LA필에서는 그에게 계관지휘자 직을 맡겨 협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안정민은 이번 여름 두다멜의 마지막 시즌을 함께할 예정이다.

차기 음악감독은 영국 지휘자 다니얼 하딩이다. 하딩은 2027~2028시즌부터 LA필 음악감독을 맡는다. 정식 취임에 앞서 2026~2027시즌에도 두 차례 LA필을 지휘한다. 안정민은 히사이시 조와의 데뷔 무대를 시작으로 두다멜 시대의 마지막과 하딩 시대의 출발을 모두 오케스트라 안에서 경험하게 됐다.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과정과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준비하는 과정을 모두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오디션 합격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안정민은 앞으로 약 1년간 수습 기간에 해당하는 '테뉴어 심사'를 거친다. 여러 프로그램을 연주하며 개인 기량과 앙상블 능력, 오케스트라 적응력과 동료들과의 협업 등을 평가받은 뒤 장기 재직 여부가 결정된다. LA필에서 어떤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자 그는 화려한 수식어 대신 동료들을 먼저 생각했다.

"동료들이 함께 연주하고 싶어 하는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뛰어난 연주 실력도 중요하지만 항상 성실하게 준비하고, 열린 자세로 소통하며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단원이 되고 싶습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