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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아비뇽] 2000석 아비뇽 교황청의 침묵…여름밤에 내린 한강의 ‘눈’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낭독극 '새' 리뷰
佛 이자벨 위페르, 韓 이혜영이 각각 주인공 맡아
피날레엔 한강 직접 등장해 4부 낭독
佛 이자벨 위페르, 韓 이혜영이 각각 주인공 맡아
피날레엔 한강 직접 등장해 4부 낭독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1부를 무대로 옮긴 낭독극 ‘새(Oiseau)’가 베일을 벗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경하’를, 한국의 명배우 이혜영이 ‘인선’을 맡아 목소리를 합친 이번 공연은 텍스트가 지닌 순수한 힘으로 아비뇽의 밤을 깊은 문학적 정적에 잠기게 했다.
2000명이 채운 침묵, 화려함 없이도 압도적
이날 1947석 규모로 알려진 명예극장은 관객들로 빈틈없이 들어차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밤 10시에 시작해 자정이 다 돼 끝나는 늦은 시간대의 공연이었지만, 관객들은 두 시간 가까이 숨소리마저 아끼며 높은 집중력을 보여줬다. 화려한 무대 장치나 역동적인 퍼포먼스 없이 오직 두 배우의 낭독과 절제된 움직임만으로 채워진 공연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무대 뒤 교황청 성벽의 아치형 창문에는 눈발이 끊임없이 흩날리는 영상이 투사됐다. 무더운 아비뇽 한복판에서 관객들은 제주의 폭설 속을 헤매는 경하와 함께 겨울을 건너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다. 돌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건축물과 새하얀 눈의 대비는 한강 소설 특유의 차갑고 고요한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왜 하필 1부 ‘새’였나
공연을 연출한 줄리 들리케는 소설 전체 서사 가운데 1부 ‘새’를 독립된 낭독극으로 구성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 현대사의 참혹한 비극 중 하나인 제주4·3을 다루지만, 소설은 그 거대한 역사를 곧바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다친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은 경하가 제주 집에 홀로 남겨진 작은 새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지극히 사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현실과 꿈,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이 혼재하는 1부의 시적이고 몽환적인 텍스트는 물리적 재현 대신 배우의 목소리와 언어의 리듬으로 무대를 구축하는 낭독극 형식에도 잘 맞아떨어졌다.
피날레, 흰옷 입은 한강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의 절정은 마지막 5분이었다. 이자벨 위페르와 이혜영의 낭독이 이어지던 무대에 흰 원피스를 입은 한강 작가가 직접 등장해 소설 3부 ‘불꽃’에 나오는 인선의 대사를 육성으로 낭독했다.이 대목은 소설 속 개인의 사적인 슬픔이 제주4·3이라는 거대하고 참혹한 역사적 진실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분기점이다. 미군정의 냉전 논리와 서북청년단의 폭력이라는 학살의 구조적 배경을 짚어내는 동시에, 새를 구하려는 개인적 여정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인선 가문의 비극이자 제주의 아픈 역사로 확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문장을 직접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자 객석의 침묵은 한층 더 깊어졌다.
두 언어와 국경을 넘어선 울림
낭독이 끝난 뒤 한강과 이자벨 위페르, 이혜영이 나란히 서서 객석을 향해 인사하자 비로소 길고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스위스에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아비뇽을 찾았다는 미리암 부르샤 씨는 “한강 소설의 오랜 팬”이라며 “여러 작품을 읽었지만 특히 <바람이 분다, 가라>를 좋아한다. 오직 한강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원작을 이미 읽었다는 안느 지레르 씨는 텍스트를 무대 위 목소리로 다시 만난 기쁨을 전했다. 그는 “책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며 “다만 소설을 읽을 때도 조금 혼란스러웠던 부분, 주인공이 눈 속에서 살아 있는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고 유령들을 만나게 되는 장면은 이번에도 여전히 아리송했다”고 했다. 한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는 “프랑스어와 한국어 두 언어가 함께 흘러가는 구성이 흥미로웠다”며 “자막을 읽으며 따라갈 수 있어 전혀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두 언어가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비뇽=설지연 기자/김은진 아르떼 객원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