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투자 확대에서 비롯된 메모리 반도체 가격 급등이 전자제품 ‘수요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스마트폰과 PC, 게임기 등의 가격이 지나치게 빠르게 올라 소비자가 교체 주기를 늦추거나 중고시장으로 발을 돌리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같은 움직임이 반도체 수요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AI發 글로벌 '칩플레이션'…전자제품 수요 감소 현실로

◇전자제품 줄줄이 가격 인상

13일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올해 세계 스마트폰과 PC 출하량은 총 13억4000만 대로 전년보다 2억 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폰 출하량 감소폭은 14%로 사상 최대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메모리 반도체가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중저가 제품의 감소폭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가격 상승의 출발점은 AI 데이터센터 투자다. 미국 빅테크가 AI 개발과 운영에 필요한 데이터센터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그만큼 스마트폰, PC 등에 사용되는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공급이 줄어들어 가격이 급등했다. 모건스탠리는 D램 가격이 최근 1년간 6배 이상 올랐다고 분석했다.

제조사는 원가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잇달아 반영하고 있다. IDC는 올해 세계 스마트폰 평균 가격이 550달러로 전년보다 94달러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내년에도 23달러 추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애플도 맥 노트북과 아이패드 가격을 20~25% 올리겠다고 밝혔다. 델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다른 PC 업체도 가격 인상에 나섰다. 게임기 가격도 뛰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5 가격을 1만8000엔 인상했고, 닌텐도는 닌텐도 스위치2 가격을 1만엔 올렸다. 메모리와 저장장치 가격 상승이 PC 및 스마트폰을 넘어 엔터테인먼트 기기 전반으로 번지는 모습이다.

◇반발하는 소비자

이 같은 가격 상승 랠리에 소비자는 새 전자제품 구매를 미루거나 중고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애플이 일부 맥과 아이패드 가격 인상 방침을 발표한 다음 날 미국 중고 거래 플랫폼 백마켓에서 중고 맥북 판매량이 전주 대비 62% 급증했다.

중고 정보기술(IT) 기기 소매업체 페이모어에서도 최근 3~6개월 동안 컴퓨터와 전자부품 수요가 약 30% 늘었다. 신제품의 기능이 구형 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가격만 올랐다는 인식이 확산하며 소비자가 중고 제품을 선택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런 벤턴 백마켓 미국 총괄책임자는 “웹 기반 AI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최신 하드웨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도 중고 수요를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중고 스마트폰 판매량은 지난해 전년 대비 3% 증가하는 데 그쳤는데 올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13% 급증했다.

미국에서는 게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과 관련된 여가 소비도 줄어드는 모습이다. CNBC에 따르면 PNC파이낸셜서비스 분석 결과 지난달 미국 소비자의 홈 엔터테인먼트 관련 제품 구매는 전년 동기 대비 감소했다. 특히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의 관련 소비가 약 4% 줄었다. 여기에 넷플릭스, 아마존, 스포티파이 등 주요 스트리밍 업체의 구독료 인상까지 겹쳤다. 미국 전기요금도 2019년 이후 45% 상승해 집에서 즐기는 여가 비용 전반이 높아졌다.

일부 소비자는 게임 구매와 유료 구독을 줄이고 유튜브 등 광고 기반 무료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 전자기기 가격 상승이 하드웨어 판매 감소뿐 아니라 콘텐츠 소비 방식까지 바꾸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 반발도 커지는 분위기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지난 6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가 D램 가격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동 감산했다는 취지의 집단소송이 제기됐다. 니혼게이자이는 “가격 인상이 장기화하면 반도체가 가계 부담을 키운다는 인식이 확산할 수 있다”며 “‘칩플레이션’이 소비를 위축시키는 동시에 반AI 정서까지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짚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한명현/김미리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