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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는 이웃 대신 사냥개 밥 준 '악질 구두쇠'...주민 고발당한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밤의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담장 하나 너머 이웃집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재력을 과시하듯 동네에 개를 풀어놨지요. 시비가 붙은 사람을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참다못한 사람들은 정부에 탄원서를 썼습니다. “그 남자는 이 시국에 개를 풀어 사냥까지 하면서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정부의 힘 센 사람들과 친구였으니까요.
그 남자의 이름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 그의 직업은 화가였습니다. 해가 지면 그는 덧창을 닫아걸고 촛불을 켰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캄캄한 방에서 무엇을 그리는지 아는 이웃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림값이 워낙 비싸 서민들은 구경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루브르 박물관이 아끼는 ‘밤의 화가’, 라 투르의 이야기.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
라 투르가 살던 400여년 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낀 작은 나라 로렌(지금의 프랑스)은 지옥 같은 장소였습니다. 강대국들이 힘겨루기를 벌일 때마다 가장 먼저 짓밟혔던 이 땅은, 당시 유럽을 30년간 불태운 '30년 전쟁'의 길목에 놓여 있었습니다. 군대가 지나가면 기근이 왔고, 기근이 물러가면 다시 역병이 돌았습니다. 그나마 남은 곡식은 지나가는 군대가 쓸어 갔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라 투르는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귀족에게나 주어지던 세금 면제 특권을 받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당시 군주나 영주들은 아끼는 예술가를 붙잡아 두려고 면세 혜택을 주곤 했는데, 라 투르의 재능이 그만큼 빼어났던 겁니다. 부유한 처가의 연줄도 여기에 한몫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능력 있고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40대 중반이던 1638년에는 전 재산이 불타 버리는 봉변까지 당합니다. 지나가던 프랑스 군인들이 그가 살던 도시에 불을 질렀거든요. 집도, 그림을 그리던 작업실도, 그 안에 쌓아 둔 그림들도 함께 재가 됐습니다. 젊은 시절의 라 투르 그림이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건 그래서입니다.
그러는 사이 라 투르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내가 사랑하는 것을 무자비하게 빼앗아 가니,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것'을 죽어라 움켜쥐어야 한다는 것을요.
낮이 가고 밤이 오면
라 투르에게 프랑스는 원수나 다름없는 나라였습니다. 그가 살던 로렌을 침략해 주민들의 삶을 짓밟았고, 라 투르의 집에는 불까지 질렀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움직였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생존 앞에서 어제의 원한은 삼켜야 했습니다. 아내와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요. 그래서 라 투르는 로렌에 파견된 프랑스의 고위 관료를 딸의 대부로 세우는 등 프랑스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라 투르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그림 한 점을 루이 13세에게 바칩니다. 어두운 밤, 촛불 아래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왕은 이 그림을 보자마자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침실에 걸린 다른 그림은 전부 치워버려라. 그리고 이 그림 하나만 남겨라. 라 투르는 최고의 화가다."
온갖 고생을 하며 삶의 덧없음을 깨달았던 걸까요. 그의 그림에서 빛이라고는 촛불이나 등잔 하나뿐. 그 불빛 아래에서 그는 젊은 날의 꼼꼼한 재주를 일부러 지우고, 주름도 붓 자국도 없이 사람의 얼굴을 달걀처럼 매끈하게 그렸습니다. 자잘한 것들이 사라진 화면에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고요함만 남았습니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감탄한 당대 사람들은 그를 '밤 그림의 화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구두쇠, 밤에는 화가
국왕의 화가 칭호를 받고 세금까지 면제받는 라 투르는 이미 로렌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번 돈을 악착같이 지키고 굴렸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면 최대한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는 많은 것을 잃어본 경험이 있었습니다.하지만 라 투르의 행동은 도를 넘었습니다. 공식 사건 기록만 봐도 그의 성격과 행패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세금을 걷으러 온 공무원을 발로 걷어차며 욕을 퍼부었다(1642년), 사냥을 하다 시비가 붙은 공무원을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1648년), 자기 땅에 들어온 농부를 폭행해 중상을 입혔다(1650년)….
그런데도 당국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도시는 매년 자기들을 다스리는 프랑스 총독에게 신년 선물을 바쳤는데, 그 선물이 바로 라 투르의 그림이었거든요. 권력자들조차 그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두들겨 패고 다니던 시절, 라 투르는 '성 베드로의 회개'를 그립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뒤 홀로 나와 통곡하는 장면. 죄를 뉘우치며 우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1652년 1월, 도시에 유행병이 돌았습니다. 아내가 죽은 뒤 보름 후, 라 투르는 뒤따라가듯 쉰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사, 그리고 인간의 아이러니
라 투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름은 지워졌습니다. 그는 그림에 서명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라 투르가 남긴 재산 덕분에 아들은 귀족이 될 수 있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직업이 '귀족답지 못한' 화가였다는 사실을 지워버렸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이 그림들이 누구 것인지 잊었습니다. 그림은 여전히 사랑받았지만, 거기엔 엉뚱한 화가의 이름표가 달렸습니다. '신생아'는 르냉 형제의 작품으로, 눈먼 악사 그림은 스페인 화가 무리요의 작품으로 오해받은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때, 나치에 맞서 산속에서 싸우던 프랑스 레지스탕스 소속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시인 르네 샤르였습니다. 그는 라 투르의 복제화 한 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들어 모든 걸 잃고도 버티는 노인을 그린 '아내에게 조롱받는 욥'의 싸구려 복제화였지요. 샤르는 그 그림을 은신처 벽에 붙여 두고 대원들과 함께 바라보곤 했습니다. 샤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히틀러의 어둠을 제압한 조르주 드 라 투르에게 감사를." 결국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로렌은 다시 프랑스의 영토가 됐습니다.
반면 갓난아기와 고뇌하는 인간, 세상의 여린 것들을 연민의 눈길로 품은 그 그림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라 투르라는 이름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의 그림은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촌스럽지 않습니다. '옛날 일'이라는 느낌도 없습니다. 인물의 사실성을 지워 매끈한 덩어리로 만든 덕분에 그의 인물들은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은, 고요하게 정지된 절대적인 시공간에 위치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그의 그림이 프랑스에서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입니다.
그림을 그리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옥 같은 시대를 살아내며 속으로 삼켰던 울음, 먼저 보내야 했던 일곱 명의 아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 프랑스 왕 앞에서 비굴하게 아첨하는 굴욕, 그 모든 걸 겪으며 뒤틀릴 대로 뒤틀린 성격… 그리고 그 사나운 인간이 이런 성스럽고 고요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언어와 기록이 메울 수 없는 이 간극. 예술은 이런 간극 사이에서 태어나 생명력을 얻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리즈에서 다룬 여러 거장들의 명작들을 실제로 볼 기회입니다. 최근 출간된 책 '명화 시리즈'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