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중재는 반드시 영어여야 하는가 [이상엽의 중재인사이드]
중재언어는 서면·심리 등 절차 전체의 공식 언어
"영어가 기본이지만…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냐"
준거법·중재지·기관 등 세가지는 계약에 명시해야
"영어가 기본이지만…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냐"
준거법·중재지·기관 등 세가지는 계약에 명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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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한 문장이 오히려 국제중재에서는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이 역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막에는 국제중재 제도 자체의 유연성이 있다.
모두가 한국어를 원했지만
중동 국가의 개인 투자자 A는 국내 중소 부동산 개발업체 B사와 투자계약을 체결했다. A는 미화 40만 달러를 B사에 투자하고, B사는 24개월 후 원금과 수익을 합산한 미화 52만 달러를 반환하기로 약정했다. 만기가 돼도 B사는 돈을 돌려주지 않았고, A는 결국 B사를 상대로 국제중재사건을 제기했다.
계약서의 중재조항에 명시된 게 있었다. 중재언어는 영어라고. 그러나 A가 선임한 법률대리인은 국내 로펌의 한국 국적 변호사였다. 중재 신청서는 국문으로 작성됐고, 함께 제출된 증거 서류 대부분 역시 한국어였다. 대리인은 곧 중재언어를 한국어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당사자 모두 한국과 연결된 사건이고, 대리인도 한국어로 일하는 상황이니 논리적으로 타당한 요청이었다.
문제는 피신청인인 B사였다. 이미 잠적한 상태였다. 대표는 연락이 끊겼고, 사무실도 폐쇄돼 있었다. 중재 절차 내내 피신청인은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리인은 중재언어를 한국어로 정하자는 일종의 사후합의서를 직접 작성해 B사에 발송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중재판정부는 원칙을 적용했다. “피신청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중재언어는 영어로 유지된다.”고.
잠적한 상대방이 동의할 수 없으니, 중재언어를 영어로 바꿀 수 없었다. 신청인이 한국어를 원했지만, 너무 잘 쓰여진 중재조항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신청인 측은 이미 한국어로 작성해 제출한 서류들의 영어 번역본을 다시 제출해야 했고, 그만큼 판정문을 받기 까지의 시간은 더 걸렸다.
중재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다
결국 중재언어는 절차의 효율성, 비용, 증거 접근성, 그리고 집행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언어 선택은 분쟁의 실체적 권리보다 절차적 부담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게 만든다.
영어가 국제중재의 기본은 맞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중재에서 영어가 가장 보편적인 언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ICC, SIAC, LCIA 등 주요 국제기관에서 영어는 사실상 디폴트다. 그러나 중재기관이 특정 국가에 기반을 두는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내 국제중재기관에서는 당사자 합의 시 한국어로 편하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일본상사중재협회(JCAA)는 일본어, 베트남 중재기관들은 베트남어로 절차 진행이 가능한 것도 당연한 이치다. 중재 당사자 모두가 특정 언어에 익숙하다면, 굳이 제3의 언어를 강제할 이유가 없다.
물론 특정 언어로 진행하는 것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한국 기업이 한국어로 중재를 진행하는 것이 절차 진행에 국한해서는 당연히 용이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로 쓰인 판정문을 외국에서 집행해야 한다면, 해당국 언어로의 번역 부담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론은, 사실 중재언어에 정답은 없다. 영어가 무조건 정답은 아니라는 얘기다. 중재언어 선택은 다양한 상황을 입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무(無) 포지션도 전략이다
이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여기 있다. 계약서를 쓰는 시점에는, 미래의 분쟁에서 내가 신청인이 될지 피신청인이 될지 알 수 없다.
신청인 입장에선 자신이 익숙한 언어로 주장을 펼치고 싶다. 피신청인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반박할 수 있는 언어를 원한다. 계약 체결 시점에는 같은 언어를 원할 것 같아도, 실제 분쟁이 터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국제적이니까 영어’라는 단순한 이유로 영어를 고정해버리는 것은, 분쟁 발생 시점에 유연하게 대응할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것과 같다.
중재언어를 계약에 명시하지 않으면, 분쟁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양 당사자가 합의해서 정하거나, 중재판정부가 계약서의 언어·당사자의 언어 능력·절차의 효율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 중재기관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관이 특정 언어에 익숙하고 편리해 한다면, 언어 유연성을 활용하는 것이 절차를 진행하는데 있어 전략이 될 수 있다.
중재인의 수도 유연하게
반대로 단독 중재인을 명시해 두었는데 예상치 못한 대형 분쟁으로 번진다면, 중요한 결정이 한 사람의 판단에만 의존하게 된다. 중재인 수를 계약에 명시하지 않으면, 중재기관이 청구 금액과 분쟁의 복잡성을 보고 유연하게 결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비용과 절차의 균형을 더 잘 맞출 수 있다.
그럼 무엇을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가
유연성을 추구하라는 말이 모든 것을 열어두라는 뜻은 아니다. 분쟁이 터졌을 때 절차의 법적 기반을 좌우하는 세 가지는 반드시 계약에 명확히 담겨 있어야 한다.
-준거법(Governing Law): 분쟁의 실질적 권리의무를 어느 나라 법에 따라 판단할지다.
-중재지(Seat of Arbitration): 단순한 심리 개최 장소가 아니다. 중재지의 법원이 절차에 대한 감독 관할권을 가진다고 보면 되고, 중재판정의 취소 문제도 중재지 법이 규율한다.
-중재기관 및 규칙(Institution & Rules): 어느 기관의 규칙으로 진행할지를 정해야 사무국 지원, 중재인 선정 방식, 절차 규정이 명확해 진다. 임의중재(Ad-Hoc)를 선택한다면 어떤 규칙을 준용할지라도 정해두는 것이 좋다.
이 세 가지가 명확하다면, 중재언어와 중재인 수는 분쟁 발생 당시의 맥락 — 당사자의 언어 역량, 분쟁의 규모와 복잡성, 집행 예상 국가 — 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중재조항: 필수는 명확하게, 나머지는 유연하게
이 사건의 신청인은 결국 판정을 받았다. 피신청인이 절차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절차는 마무리됐고, 상당한 금액의 지급 판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중재언어는 영어’라는 조항 하나로 인해 절차는 불필요하게 복잡해졌고, 번역과 지연이 더해졌다. 한국어로 진행됐다면 훨씬 신속하고 효율적이었을 사건이었다.
중재조항은 계약 협상에서 뒤에 붙는 단순한 ‘표준 조항’이 아니다. 분쟁이 생겼을 때 어떻게 싸울지를 미리 설계하는 문서다. 그 설계는 계약 체결 시점의 막연한 관행이 아니라, 분쟁 발생 시점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를 염두에 두고 이뤄져야 한다. 필수적인 것은 명확하게, 나머지는 유연하게 — 그것이 분쟁에 강한 국제중재조항을 만드는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