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AI를 넘어서는 성공투자' 한국경제신문의 투자 전문 플랫폼 '한경 프리미엄9'에 실린 기사입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여든을 넘긴 노인이 심장 수술을 받았다. 막힌 혈관에 우회로를 내기 위해 흉골을 가르고 가슴을 여는 큰 수술이었다. 열흘 넘게 입원해 날마다 모르핀을 맞고, 부축을 받아 겨우 퇴원했다. 마취조차 다 깨지 않은 퇴원한 그날 세 자녀가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이튿날 새벽 1시 노인은 증여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2년 뒤 법원은 이 계약을 전부 무효라고 판단했다. 아버지를 상대로 한 자녀들의 청구는 전부 기각됐다. 공증인의 인증까지 받은 계약서가 어떻게 무효가 됐을까, 그 과정을 따라가 보면 상속·증여를 설계하는 이들이 새겨둘 만한 대목이 보인다.

수술 직후 작성된 증여계약서

출처: 한경DB
출처: 한경DB
노인에겐 평생을 바쳐 키운 상장회사가 있었고, 세 자녀는 회사를 물려받아 각기 임원급 지위를 누렸다. 배우자와 사별한 뒤 그는 오래 알고 지내던 여성과 여생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고, 자신이 단독으로 소유한 아파트에서 그 여성과 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여성에게 아파트를 주겠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머지 재산을 이미 다 받은 자녀들은 “그 집도 어머니가 마련한 것”이라며 반발했고, 이 일로 부모 자식 사이가 틀어졌다.

증여계약서의 골자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 아파트를 팔아 매각대금 전액을 자녀들에게 준다는 것(제1항). 다른 하나는, 자녀들이 그날 확인한 재산 외에 아버지 소유로 남은 차명·해외·비밀계좌가 ‘1원이라도’ 더 있으면 그 사실을 안 날부터 일주일 안에 전 재산을 자녀들에게 넘긴다는 것(제2~4항)이었다.

반감이었을까 지나친 염려였을까. 실제로 그날 밤 자녀들은 아버지의 회사 컴퓨터를 가져와 계좌를 조회했고, 아버지의 측근을 불러 차명재산 유무까지 확인했다. 계약서에 날인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파트를 29억원에 팔았다. 다만, 자녀들 중에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는 사람은 없었으니 당장 살 곳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새 거처를 마련하고, 대신 그 집을 유언대용신탁으로 묶어 사후수익자를 자녀들과 손주들로 미리 지정해 두었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공증까지 받은 계약"을 들어 매각대금 29억 원과 지연이자를 법원에 청구했다.

쟁점은 ‘계약의 성립’이 아니라 ‘계약의 효력’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증여계약이 체결돼 성립한 것은 다툴 수 없었다. 쟁점은 그 계약을 무효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가온은 이 계약이 선량한 풍속 등 사회질서에 반하여 무효(민법 제103조)라고 다퉜다. 흔한 주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흉(開胸) 수술을 마치고 막 퇴원한 노인을 회복할 틈도 없이 새벽까지 몰아붙여 사실상 전 재산을 내놓게 한 합의를 부모 자식 사이의 정상적인 증여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자녀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설령 전 재산 증여를 정한 제2~4항이 무효라 해도, 아파트 대금을 준다는 제1항은 흔한 증여이니 유효하다”는 주장이었다. 민법 제137조 단서가 그 근거다. 법률행위의 일부가 무효인 경우라도 ‘그 무효 부분이 없었더라도 당사자가 나머지는 했으리라’는 가정적 의사가 인정되면 그 부분의 효력은 인정된다.

전 재산은 아니더라도 아파트 매각대금 29억원 만은 증여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리 숨겨둔 재산이 없는 부친 입장에서는 그 조항이 계약의 전부기도 했다.

다섯 번 고쳐 쓴 계약안이 말해주는 것



해답은 자녀들이 스스로 법원에 제출한 자료 안에 있었다. 그들은 최종 계약서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 고쳐 쓴 계약안(제1안~제5안)을 증거로 제출했다. 가온은 초안에서 최종안까지 어떤 문구가 더해지고 빠졌는지 그 수정 과정을 차례로 따라가면서, 계약서에 담긴 자녀들의 진짜 의도를 재구성했다.

순서대로 읽으면 이렇다. 처음(제1안) 자녀들이 원한 것은 ‘아버지 전 재산의 절반’이었다. 그때는 아버지 재산으로 무엇이 있는지 몰랐기에, 아파트 대금의 1/2과 퇴직금의 1/2을 적은 뒤, ‘나머지 재산의 1/2’이라는 막연한 표현에 머물렀다. 답답했던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의 소재를 밝힐 의무(제2안)를, 이어서 자신들에게 재산 확인을 위한 법적 권한을 부여할 의무(제3안)를 차례로 추가해 부담시켰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자녀들은 재산 확인을 위해 직접 나섰다. 그날 밤 아버지 회사에서 컴퓨터를 가져오게 하여 계좌를 조회하고 측근을 통해 차명재산까지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계약안의 작성일자가 다음날로 넘어갔다.

이렇게 재산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4안·제5안에서 ‘나머지 재산의 1/2’이라는 막연한 문구가 사라지고, 증여 목적물이 간단하게 ‘아파트 매각대금 전액’으로 확정됐다. 그와 함께 “확인시켜 준 재산 외에 1원이라도 더 있으면 전 재산을 준다”는 진술·보장 조항과 위약금 조항도 두었다. 이것이 곧 증여계약서의 제1항과 제2~4항이 됐다.

계약안의 수정 과정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제1항에서 목적물을 ‘아파트 매각대금’만으로 과감하게 좁힐 수 있었던 것은, 제2~4항에서 “아버지 재산은 이것이 전부”라고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두 조항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로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숨겨둔 재산은 없다”는 보장이 없었다면 자녀들은 아파트 대금만으로 충분한지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2~4항이 없었다면 제1항도 체결되지 않았을, 전체가 불가분인 하나의 계약이다. 계약을 나눌 수 없는 이상 ‘일부만 무효’라는 주장은 설 곳이 없고, 결국 계약 전체가 무효가 된다.

법원도 “쪼갤 수 없는 계약”이라고 봤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법원은 아버지 측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법원은 제2~4항이 무효라도 제1항은 유효하다는 자녀들의 주장을 배척했다. 제1항과 제2~4항이 ‘상호 밀접하게 결합돼’ 있어, 어느 하나를 떼어 그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법원은, 이 계약은 아버지의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일반적 행동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어서, 전부가 무효라고 명확하게 이유를 설시했다.

법원이 그렇게 본 데에는 계약이 체결된 정황이 깔려 있다. 80대 노인은 큰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날, 회복할 틈도 없이 새벽까지 증여를 요구받았다. 자녀들은 역할을 나눴다. 회사 컴퓨터로 아버지의 계좌를 조회하고, 측근을 불러 차명재산을 확인했으며, 날인 장면을 촬영했다. 일부 자녀는 절연 의사까지 밝혔다. 법원은 자녀들이 아버지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해 계획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봤다.

이 사건이 남긴 두 가지 교훈



첫째, 자녀들의 지나친 불안이 불필요한 송사를 불렀다. 계약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회사를 이미 다 물려줬고, 남은 거의 유일한 재산인 새 거처도 유언대용신탁을 설정해 사후수익자로 자녀들과 손주들을 지정해 두었다. 이미 숨겨둔 다른 재산도 없음을 확인한 마당이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 무리한 날 무리한 내용의 증여계약서를 쓰고 심지어 그 증여계약서를 기초로 소송을 제기한 지점에서 이미 선을 넘었다.

둘째, 분쟁의 승패는 사소해 보이는 자료를 끝까지 파고드는 데서 갈린다. 이 사건을 가른 것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상대가 제출한 계약안을 차례대로 짚어가며 ‘목적물의 확정’(제1항)과 ‘전 재산 확인의 보장’(제2~4항)이 하나로 맞물려 있었음을 드러낸 작업이었다. ‘일부만은 유효’라는 자녀들의 주장은 바로 그 대목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족 사이의 송사에 온전한 승자는 없다고들 한다. 아버지는 이렇게 1심에서 전부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발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자녀들에게 주고 소송을 마무리 지었다. 다만 이 판결로 아버지는 노년의 사랑과 생계 기반은 지켰다. 그리고 자녀들의 막연한 불안 앞에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다시 한번 가족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