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결제 인프라…자금세탁방지는 어떻게? [태평양의 미래금융]
복잡해진 결제 구조…혼합결제 시대 도래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정체성 문제 대두
AML 적용범위 등 재검토 필요한 시점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정체성 문제 대두
AML 적용범위 등 재검토 필요한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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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 구조의 변화: 단선에서 다층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 결제의 경로는 단순했다. 은행 계좌에서 카드로, 카드에서 해외 가맹점으로. 자금의 출발지와 도착지가 명확했고, 중간에 책임질 기관도 분명했다. 환전은 은행이, 결제 승인은 카드사가, 정산은 글로벌 카드 네트워크가 각각 담당하는 구조였다. 규제 당국은 이 기관들을 통제함으로써 자금 흐름 전체를 사실상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결제의 풍경은 달라졌다. 페이먼트 앱과 디지털 지갑이 연동되고, 지갑과 지갑이 국경을 넘어 직접 연결된다. 중간에 은행이나 카드사가 개입하지 않는 결제 경로가 일상화되고 있다. 여기에 USDT 같은 스테이블코인이 실질적 결제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구조는 더욱 복잡해졌다.
법정화폐로 시작한 자금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되고, 여러 지갑을 경유해 해외 수취인에게 도달하는 과정에서 자금의 성격과 경로를 추적하는 일은 기존 방식으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성격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있다. USDT는 달러인가, 가상자산인가. 결제 수단인가, 투자 자산인가. 이 물음은 단순한 분류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적용되는 규제 체계 전체가 달라진다. 외국환거래법상 지급 수단에 해당하는지, 특정금융정보법상 가상자산으로 규율되는지, 전자금융거래법상 전자화폐로 볼 수 있는지. 현행 법 체계 어디에도 명확한 답이 없다.
미국은 2025년 7월 GENIUS Act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비증권 결제 수단으로 규율하고 발행사에 은행비밀법을 적용하는 프레임워크를 마련했다. 유럽은 MiCA를 통해 전자화폐토큰(EMT) 규율 체계를 갖췄다. 반면 한국은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성격 정의와 발행·유통 규제 체계 마련이 아직 2단계 입법 과제로 남아 있다. 제도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규제의 사각지대는 넓어진다.
중개기관의 공백과 AML 체계의 한계
혼합결제 환경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법정화폐 결제와 스테이블코인 결제가 하나의 거래 안에서 결합되면, 자금의 출처와 경로를 단일한 규제 프레임으로 포착하기 어려워진다. 각 구간을 담당하는 중개자가 다르고, 적용 법령도 다르며, 정보 공유 의무도 단절된다. FATF는 2026년 3월 보고서에서 비수탁지갑을 경유하는 P2P 거래 구간을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의 핵심 취약점으로 명시하고, 기존 트래블룰만으로는 이 구간을 충분히 포괄하기 어렵다는 점을 공식화했다.
한국도 이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올해 트래블룰 적용 범위를 100만 원 이하 소액 거래로 확대하고,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한 자금세탁방지 의무 부과를 추진하고 있다. 방향은 옳으나, 규제의 속도가 생태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간극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디지털 결제 생태계가 기관 중심에서 흐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만큼, 자금세탁방지 체계의 적용 범위와 의무 주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성격을 명확히 정의하고, 지갑 서비스 제공자와 결제 중개자를 포함한 새로운 의무 주체 체계를 단계적으로 법제화하는 한편, 온체인 거래 데이터를 자금세탁방지 모니터링 인프라에 통합하는 방안도 중장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기관을 통제할 것인가라는 기존의 질문에서, 자금의 흐름 자체를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정책의 시선을 넓혀가는 과정이 요구되고 있다. 결제 인프라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고, 제도적 대응의 방향 설정은 그 속도에 맞추어 이뤄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