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다면
강현우 정치부 차장
장기기증 사례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이 표현을 쓸 수 있는 영역이 또 있다. 사망자의 데이터를 활용한 의료 연구다. 환자가 어떤 치료를 받았고, 이후 몇 년을 더 살았으며, 어떤 약물이 효과를 냈거나 부작용을 일으켰는지 등이 사망자의 의료 데이터다. 의료 연구의 상당 부분은 환자의 사망 원인까지 분석해야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한 사람이 평생 쌓은 의료기록이 미래의 환자를 살리는 핵심 자산이 될 수 있다.
유족 동의 없인 무용지물
인공지능(AI)이 의료 연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지만, 적절한 데이터 없이는 AI도 제대로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의료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확성을 높인다.사망자의 치료 경과 정보는 의료 AI가 질병을 학습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다. 희소질환 연구에선 더욱 그렇다. 사례가 적은 희소병은 한 환자를 통해 수년에서 수십 년간 축적되는 자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연구기관이 대규모 의료데이터를 활용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도 사망자 의료데이터를 활용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이 데이터를 활용할 길이 사실상 막혀 있다.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 체계 때문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를 살아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라고 규정한다. 사망자 정보는 보호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사망자 정보라도 유족과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면 유족의 개인정보라고 본다. 사망자 정보를 활용하려면 유족 동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생명윤리법)도 걸림돌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연구하려면 연구대상자 또는 대리인의 서면 동의가 필요하다고 규정하는데, 대상자의 생존 여부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사망자 의료데이터를 활용하는 데 유족 동의가 필요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현장에선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사망자 정보 활용성 높여야
미국과 유럽은 사망자 의료데이터를 연구에 폭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 미국은 원칙적으로 사망 후 50년간 의료정보를 보호하지만, 연구 목적일 때는 예외를 허용한다. 이 경우 유족의 동의가 필요 없다.유럽은 규제가 더 적다. 유럽연합(EU) 개인정보규정은 사망자 개인정보는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명시하고, 회원국에 정보 활용 방식에서 자율성을 부여한다. 모범 사례로 꼽히는 북유럽 국가들은 정부가 사망자 의료정보를 통합 관리하면서 연구자에게 직접 데이터를 제공한다.
국내에선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1월 생명윤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연구대상자를 생존자와 사망자로 구분하고, 사망한 연구대상자와 유족의 명시적인 거부가 없다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이 법안은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고 있다. 국회가 정쟁 속에 공전하는 탓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정보 유출 및 데이터 오남용 가능성 우려가 아직도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활용 자체를 막는 이유보다는 안전장치를 강화하는 이유가 돼야 한다. 장기 기증으로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사망 후 데이터를 제공해 질병 치료에 기여하는 것도 공익적 가치가 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