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대기업, 중견기업을 상대로 단체협상과 단체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정부가 길을 터주기로 했다. 공정거래법상 담합 규정 적용을 면제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택배기사와 화물차주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노무제공자)의 단체행동도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대표성이 없는 소규모 단체가 난립해 무더기 협상을 요구하고, 납품단가 인상 요구가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전이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본지 4월 7일자 A8면 참조

◇소상공인도 단체행동 한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30일 국무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을(乙)의 협상력 강화를 위한 제도 개편 방안’을 보고했다. 개편안의 핵심은 국내 사업자의 98.2%에 달하는 소기업(소상공인 포함)이 대기업 및 중견기업과 단체협상에 나설 때 별도 심사 없이 담합 규정 적용을 면제하겠다는 내용이다. 협상 참가자 중에 중기업(업종별 매출 15억~1800억원)이 포함될 땐 형식적 신고 요건만 만족하면 된다. 공정위는 연내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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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안이 시행되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은 가격, 거래 조건, 거래량, 거래 지역 정보 등을 교환하고 합의하는 행위는 물론 단체행동도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들이 거래 조건을 공유하고, 납품단가 인상을 주장하며 공동 납품 거부에 나설 수 있다. 쿠팡이츠를 비롯해 배달앱에 입점한 소상공인은 배달 수수료 인하 등을 안건으로 단체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공정위는 보험설계사, 택배기사, 화물차주, 건설기계기사, 골프장 캐디 등 산재보험법상 18개 직종 노무제공자도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일부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노동조합을 ‘사업자단체’로 규정하고, 이들의 단체행동을 담합·사업활동 제한 행위로 제재해온 공정위의 기존 기조를 폐기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제도 개편에 속도를 내달라고 주문했다. 이 대통령은 “(을의 협상력 강화를) 법제화하는 건 정말 잘했다”며 “입법이 지연돼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량권을 충분히 발휘해 조치해달라”고 말했다.

◇담합 조장으로 물가 상승 우려

중소벤처기업부와 더불어민주당도 ‘을의 협상력’ 강화를 위한 법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공정거래법에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단체행동을 담합으로 보지 않겠다는 내용만 규정할 수 있다. 단체협상권을 부여하고, 대기업에 교섭 의무를 부여하기 위해선 개별법을 따로 개정해야 한다.

중기부는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을 개정해 중기협동조합에 협의요청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상대방이 협의 요청에 반드시 응하도록 의무화하고,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협동조합이 중기부에 조정 신청을 해 협의 요청이 실제 협상으로 이어지도록 보완 제도도 마련하기로 했다.

공정거래법과 관련 법 개정이 마무리되면 중소기업·소상공인과 거래하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엔 단체협상 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수많은 협력사에서 부품을 공급받아 자동차를 생산하는 완성차 업체 등은 삼삼오오 모인 단체로부터 무더기로 협상 요구를 받을 우려가 있다.

납품단가 인상이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소상공인 등이 다 함께 가게 문을 닫는 등 단체행동에 나서면 직접적인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 사이에선 을의 협상력 강화를 위한 제도 개편이 ‘제2의 노란봉투법’이 돼 현장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담합에 예외를 적용한다는 것은 공정거래법 취지 자체에 어긋나는 방향”이라며 “대표성 없는 단체들이 요청하는 협상에 모두 응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소비자 이익의 현저한 침해가 발생하는 경우 공정위가 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예외 조항을 통해 부작용을 차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관/곽용희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