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친환경 탈'을 쓴 EU 보호무역주의
오는 8월 새 포장재 규제 시행
서류 하나에 수출길 막힐 수도
곽주영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서류 하나에 수출길 막힐 수도
곽주영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PPWR의 주요 내용은 과대포장 금지, 재활용 가능성(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평가), 재생원료 사용 의무 등이다. 이를 준수한다는 ‘적합성 선언서’(DoC)와 ‘기술문서’(TD) 등을 필수로 제출해야 한다. 문서가 없으면 EU 세관을 통과할 수 없다.
포장재는 1차, 2차, 3차 등으로 나뉘어 하나의 제품에도 종이와 플라스틱, 잉크, 테이프, 라벨 등 다양한 원료가 들어간다. 이들 각각에 대해 재생원료 사용 여부와 재활용 가능성 등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다 ‘가능한 한 최소화된’ 포장이라는 점도 입증해야 한다. 물론 포장재 공급업체가 제출한 서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EU는 더 많은, 더 강한 규제를 더 많은 영역에서 도입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글로벌 지속가능성 규제는 이미 선언적 문구를 넘어 우리 수출 기업의 생사(生死)를 가르는 장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허위·과장 친환경 광고를 막는 ‘그린워싱 방지 지침’부터 제품 전 과정에서 내구성과 재활용성을 따지는 ‘에코디자인 규정’(ESPR)이 대표적이다. 탄소 배출량에 맞춰 사실상의 관세를 물리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커피와 목재 등 7대 원자재의 ‘산림전용 방지규정’(EUDR) 등에 이르기까지 촘촘하다. 화학물질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규제안이 마련되고 있다. 역대 최고 수준의 화학물질 규제로 꼽히는 과불화화합물(PFAS)의 전면 금수 조치가 막바지 의견 수렴 단계에 접어들었고, ‘화학물질 등록·평가·승인·제한규정’(REACH) 역시 한층 더 조여 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명분 이면에는 유럽의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보호무역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과거 ‘강제노동 생산품 수입금지법’이나 ‘공급망실사법’(CSDDD)은 적어도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데 비해 최근 입법 움직임은 철저히 유럽 우선주의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같은 사례로는 논의 중인 ‘유럽 산업 가속화법’(IAA)이 꼽힌다. 표면적으로는 저탄소 요건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유럽산 부품 비율을 강제하는 ‘유럽판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에 가깝다. 과도한 해외 의존도를 낮추겠다며 유럽 내 생산 비중 확대를 못 박은 ‘핵심 의약품법’(CMA) 역시 마찬가지다.
디지털 분야의 칼날은 더 매섭다. EU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사이버보안법 2.0’은 에너지, 의료, 금융 등 18개 핵심 분야의 제품·서비스 공급망 전체를 상시 감시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고위험 공급업체로 낙인찍히면 EU 시장 진입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초강수다. 지속가능성과 안보를 위한 조치라지만 실질은 거대한 무역장벽을 쌓아 올리는 셈이다.
PPWR 시행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면서 수출 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당장 EU 수입업자는 DoC와 TD 등을 요구하며 우리 기업의 목을 죄어오고 있다. 통관 이후 발생하는 모든 법적 책임과 페널티를 수입업자가 온전히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포장재 서류 하나에 발이 묶이는 어처구니없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실무 공급망의 리스크를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