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쟁하지 않기 위한 경쟁
진입만 하면 지대 누려온 구태
AI 시대 노동시장부터 바꿔야
최상엽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AI 시대 노동시장부터 바꿔야
최상엽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고용지표에서도 비슷한 역설이 보인다. 반도체 호황으로 수출은 양호하고 주요 기업의 실적과 주가는 크게 개선되고 있지만, 그 온기가 노동시장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조업과 청년 고용의 부진은 기술과 자본시장 호황이 일자리와 내수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도체와 주식시장 중심 호황은 고용·소비 파급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 문제는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술의 성과가 경제 전체로 확산하는 경로가 막혀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 흔히 무한경쟁 사회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경쟁이 그토록 치열한데도 생산성은 낮다는 사실이다. 경쟁의 순기능이 효율성 향상이라면, 왜 우리는 더 많이 경쟁하면서도 더 생산적인 사회가 되지 못했을까. 필자는 그 이유가 한국의 경쟁이 경쟁하지 않기 위한 경쟁이 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좋은 대학, 전문직 자격, 대기업 정규직처럼 일단 진입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대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향한 조기 경쟁이 지나치게 강해졌다. 경쟁은 혁신과 창업, 시장에서의 성과가 아니라 시험과 선발의 문턱에 집중됐다.
이 구조는 노동시장 이중 구조와 맞물려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갉아먹는다. 초기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계속 배우고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유인이 약해진다. 반대로 좋은 대학이나 안정된 직장에 진입하지 못한 이들은 이후에 노력해도 더 나은 일자리로 이동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승자는 안주하고 패자는 좌절하는 구조에서는 평생학습도, 직무 전환도, 조직 혁신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AI는 이 낡은 구조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AI가 생산성을 높이려면 단순히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절약된 시간을 새로운 업무, 고객, 상품, 시장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직무를 재설계하고, 성과에 따라 보상하며, 노동자가 생애 전반에 걸쳐 다시 배우고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에게는 첫 직장이 평생을 결정하지 않도록 다양한 진입 경로와 경력 축적 기회를 열어줘야 하고, 중장년에게는 기존 직무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일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AI 시대의 노동시장 개혁은 단순히 해고를 쉽게 하자는 논의가 아니다. 핵심은 보호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특정 일자리 자체를 보호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더 생산적인 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실업급여와 직업훈련, 전직 지원, 성과 기반 보상, 직무 중심 인사체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기업도 AI를 비용 절감 수단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와 조직 구조를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AI는 한국 경제의 생산성 정체를 풀 중요한 기회다. 그러나 경쟁하지 않기 위한 경쟁, 이동이 막힌 노동시장, 안주를 유도하는 기업 생태계가 그대로라면 AI는 더 빠른 보고서와 편리한 검색 도구에 머물 것이다. 생산성 혁명의 마지막 퍼즐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절약된 시간을 새로운 가치 창출로 바꾸는 노동시장 개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