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농업은 나누는 기술, 비단길에 뿌린 씨앗
이승돈 농촌진흥청장
지난달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다녀왔다. 두 나라는 광활한 초원과 오랜 농경·유목의 전통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넓은 땅이 곧 넉넉한 농업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은 귀하고, 기후는 빠르게 변한다. 좋은 품종과 장비, 전문 인력도 충분하지 않다. 농업기술은 그곳에서 산업 정책이기 전에 한 농가의 생계이고, 아이들의 식탁이며, 지역의 내일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변화는 인상적이다. 우즈베키스탄 시르다리아의 낙농 농장에서는 우리 기술로 태어난 송아지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한국산 수정란 이식 기술은 현지 축산업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보급을 넘어 생산성 향상과 농가소득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신호였다.
벼 연구소의 논에서도 비슷한 변화를 마주했다. 한국산 농기계와 현지에 맞춘 벼 품종, 기계이앙 기술이 결합하자 노동의 고단함은 크게 줄고 생산성은 높아졌다. 물과 노동이 모두 귀한 땅에서 농사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식량 부족을 이겨내며 축적한 경험이 중앙아시아의 논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꽃피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의 축산연구소에는 현대화된 실험실이 문을 열었다. 한국의 젖소 유전자원과 인공수정 기술을 전수하고, 현지 전문 인력을 양성해왔다. 그 결과, 사업에 참여한 농가의 우유 생산량은 재래종보다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초원의 나라에서 우유 한 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농가의 소득이고, 아이들의 영양이며, 지역 산업의 출발점이다.
공적개발원조(ODA)는 무언가 베풀거나 주는 일이 아니다. 상대의 땅과 계절을 이해하고, 그들이 가진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과정이다. 농촌진흥청의 KOPIA 사업도 마찬가지다. 우리 기술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물, 흙, 사람에 맞게 다시 다듬어 오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진정한 개발 협력은 조용하고 깊다. 한 번의 성과보다 지속되는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중앙아시아의 들판이 오래 눈앞에 남았다. 메마른 대지 위로 새 풀이 올라오듯, 기술은 사람의 손을 거쳐 삶의 변화로 자라고 있다. 농업은 본래 혼자 축적할 수 없는 지혜다. 좋은 씨앗은 건너가야 하고, 물길은 나눠야 하며, 경험은 사람 사이를 지나야 오래 살아남는다.
최근 중앙아시아 국가와의 협력은 농업기술 교류를 넘어 지평이 확대되고 있다. 대한민국 농업의 저력은 이미 세계를 향하고 있다. 우리 기술이 중앙아시아의 미래를 밝히고, 국경을 넘어 인류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 동반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바람이 길을 내는 땅, 눈 덮인 산맥이 하늘과 맞닿은 땅, 중앙아시아를 다녀오며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농업은 함께 먹고, 함께 키우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오랜 약속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나눔의 길을 더 넓고 단단하게 잇는 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방식의 국제 협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