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고독에 잠긴 음악가가 멋있어 보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 안에서 배우고 느끼지 않으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음악가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존재니까요.”
최근 서울 강남구 구본숙스튜디오에서 만난 첼리스트 한재민(20)은 흔히 떠올리는 ‘골방에 틀어박힌 천재형 음악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겐 언제나 ‘첼로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일상에선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다니길 좋아하는 여느 20대와 다르지 않았다. “예전엔 연습만 했다”던 한재민은 요즘 무대 밖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풍성하게 가꿔줄 재료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사람을 모르고 사랑하지 않으면 좋은 연주도 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그의 얼굴에서도 앳된 티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아무나 소화하기 어려운 체크무늬 슈트에 갈색 구두를 멋스럽게 신고 나타난 한재민은 쑥스러워하다가도 카메라 앞에선 이내 능숙하게 자세를 바꾸며 현장 분위기를 장악했다. 첼로와 함께 포즈를 취할 땐 신청곡을 받아 실제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프로의 여유였다.
① 지난달 서울 강남구 구본숙스튜디오에서 만난 첼리스트 한재민이 사진을 촬영하는 도중 활짝 웃고 있다. ⓒ구본숙
빨간 양말은 이제 안녕
한재민은 만 5세부터 첼로를 연주했다. 플루티스트인 부모님이 취미로 권한 악기 중 유독 첼로의 깊은 울림에 이끌렸다. 그는 여덟 살 때 원주시립교향악단과 협연했고, 열네 살이던 2020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최연소 예술 영재로 조기 입학했다.
“부모님은 음악은 취미로 하는 게 좋다고 하셨지만 전 계속하겠다고 졸랐어요. 그때 부모님과 일종의 딜(거래)을 했죠.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면 첼로를 전공할 수 있다는 거였는데, 감사하게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오사카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하고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어요.”
클래식계에 한재민 이름 석 자가 각인된 건 2021년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때부터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그는 루마니아에서 열린 동유럽권 최대 규모의 이 대회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결선에서 연주한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 작품의 강렬함을 드러내기 위해 착용한 ‘빨간 양말’은 이후 한재민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부적과도 같은 그의 빨간 양말은 무대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듯하다.
② 2021년 금호영재오프닝콘서트 무대에 선 첼리스트 한재민과 그의 단짝인 피아니스트 임윤찬. 금호문화재단 제공
“미학적으로 그리 예쁘지도 않고,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요. 양말보다 연주에 더 집중해야죠.(웃음)”
한재민은 2023년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유학 중이다. 세계적인 현악 연주자를 길러내는 곳으로,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서울대 교수)와 양인모·임지영(연세대 교수)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그는 “동료 연주자가 모두 실력자지만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다 같이 잘하자는 분위기”라며 “음악적 주관이 확고한 연주자들과 실내악을 하며 배우는 즐거움이 크다”고 했다.
쌓이는 인생 경험만큼 그의 연주도 한층 성숙해지고 있다. “그동안 본능에 충실한 연주를 해온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제 연주를 다시 들었을 때 아쉬운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이렇게 연주할 이유가 없었는데’ 하고요. 요즘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연주인지, 그 근거를 찾는 데 더 신경 쓰고 있어요.”
“아름다운 목소리에 가까운 연주”
한재민은 작품을 익힐 때 거침없는 상상력을 발휘하곤 한다. 곡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내용으로 자신만의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가령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비애를 담은 영국 작곡가 엘가의 첼로 협주곡(Op. 85)은 “가족을 남겨두고 전쟁에 나간 한 영국인 장군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체화한다. 그는 “많은 관객이 좋아하는 1악장의 클라이맥스는 배에 탄 군사들이 장군을 따르겠다고 외치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린다”고 말했다.
③ 첼로와 마주보고 있는 한재민. ⓒ구본숙
한재민은 오는 7월 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이 곡을 연주한다. 스위스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선보이는 협연 무대다.
한재민에게 ‘좋은 연주’란 뭘까. 그는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의 연주를 예로 들었다. “음 하나를 틀리더라도 그 실수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연주가 있어요. 음악 자체로 사람을 설득하는, 마법을 부리는 연주죠. 저도 그런 연주를 하는 게 꿈이에요. 제 연주 시간만큼은 관객이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처럼 음악에 깊이 빠져들고 공감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동료 예술가와 나누는 시간도 그가 말하는 좋은 연주의 밑거름이 된다. 그중에서도 피아니스트 임윤찬(22)과는 10대 청소년기 금호영재 시절부터 한국예술영재교육원, 한예종 동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5월에는 2년 만의 전국 투어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임윤찬과 일정이 겹쳐 만날 수 있었다. 두 클래식 스타의 저녁 메뉴는 “곱창에 소주”였다고. 한재민은 임윤찬에 대해 “음악적으로 배울 게 정말 많은 존경스러운 형”이라며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라 큰 자극이 된다”고 말했다.
한재민은 첼로의 매력을 ‘카멜레온’에 비유했다. “첼로는 매력이 넘쳐나는 악기예요. 인간의 목소리로 치면 소프라노부터 베이스까지 폭넓은 음역대를 모두 소화할 수 있잖아요. 주인공이 됐다가 서포터가 되기도 하고요.”
다채롭고 깊은 소리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한재민은 목소리가 악기인 오페라를 즐겨 듣는다. 그의 플레이리스트엔 첼로 협주곡뿐 아니라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푸치니의 ‘라 보엠’과 ‘토스카’ 등이 수록돼 있다.
“첼로를 연주할 때도 사람 목소리와 비슷하게 내려고 노력해요. 목소리보다 아름다운 소리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최대한 가까운 연주를 하고 싶어요.”
내년에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곡(5곡)을 연주할 계획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첼로 음악의 ‘구약성서’라면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는 ‘신약성서’로 비유되는 걸작이다. “먼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항상 다음 연주를 잘하는 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