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며 지휘, 음악 더 깊이 이해
전통적이지 않은 것이 나만의 매력
가능한 한 높은 수준 음악 하고파
한강의 소설 '흰' 협주곡 초연 맡아
런던심포니·코펜하겐필과 공연도
올해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축제’의 얼굴은신선했다. ‘노래하는 지휘자’ 바버라 해니건이 상주 음악가로 축제 전면에 등장하면서다. 현대음악의 전도사이자 클래식계 혁신의 아이콘인 그는 81년 역사의 이 축제에서 파격적인 기록을 여럿 남겼다. 지난 2일 체코 프라하의 대표 공연장 루돌피눔에서 한국 언론 최초로 그를 만났다.
성악가 출신 지휘자
캐나다 출신 해니건은 소프라노 겸 지휘자다. 그는 성악가로 100곡이 넘는 작품을 세계 초연했으며 피에르 불레즈, 리게티 죄르지, 조지 벤저민 등 동시대 거장 작곡가들과 두루 협업했다. 올해 캐나다 예술가 최고 영예인 ‘총독 공연예술상’을 받았고 허비 행콕, 퀸과 함께 폴라음악상(2025년)도 수상했다.
그에게 지휘는 대화다. “음악은 악기와 목소리로 이뤄진 대화라고 생각하죠. 하이든 교향곡이든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이든, 한 악기가 다른 악기와 어떻게 대화하고 서로를 지지하는지 늘 찾습니다.” 그는 “지휘할 때 온몸이 노래하고, 노래할 때 온몸이 지휘한다”고 표현한다. 노래와 지휘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공명하는 것. “지휘를 통해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고, 성악가로서 음악에 더 빠져들게 했어요. 두 역할이 서로 영양분이 됩니다.”
프라하의 봄 상주 음악가
세계 최정상 악단과 거장들이 오르는 프라하 루돌피눔 드보르자크홀. 해니건은 2주간 루돌피눔에 머물며 네 차례 공연과 마스터클래스를 이끌었다. 단순한 객원이 아니었다. 축제의 얼굴이자 그 정신을 함께 만드는 예술적 동반자였다.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소감에 대해 그는 “벽, 바닥, 콘서트홀 모든 것이 역사로 가득한 루돌피눔에서 제 음악을 건물에 스며들게 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해니건은 예술적 DNA가 뿌리 깊은 프라하에 각별한 애정이 있다. “프라하는 제게 문화, 음악, 예술, 영화, 연극이에요. 거리 곳곳에서, 아름다운 건물에서 그 풍부한 역사를 느낄 수 있어요.”
전통 위에 선 혁신
프라하 축제는 왜 해니건을 선택했을까. 역설적으로 그 답은 그의 ‘비(非)전통성’에 있다. “저는 전통적이지 않지만 음악에 진정성 있는 태도를 지니고 있어요. 저 자신과 감정, 작곡가, 음악가, 관객을 대할 때 진실합니다. 어떤 면에선 그게 클래식이라고 생각해요.”
소프라노인 그의 음악적 뿌리는 전통과 닿아 있다. 클래식부터 현대음악까지, 노래할 땐 벨 칸토 창법을 고수한다. 벨 칸토는 18세기 이탈리아에서 완성된 성악 창법으로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발성으로 꼽힌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클래식의 가장 전통적인 발성법으로 담아내는 철학. 그것이 전통의 축제와 혁신의 아이콘 해니건이 만날 수 있었던 접점이다.
리사이틀부터 체코필 협연까지
해니건이 선보인 네 번의 무대는 매번 달랐다. 피아니스트 베르트랑 샤마유와의 리사이틀, 벨체아 콰르텟과의 실내악, 오페라 ‘인간의 목소리’, 체코필하모닉과의 협연. 각 무대는 그의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특히 오페라 ‘인간의 목소리’는 무대 위 멀티태스킹의 극단이었다. 이별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심리를 노래하고 강렬한 제스처로 연기하면서 동시에 체코필하모닉을 지휘했다. 무대 뒤편 대형 스크린에는 클로즈업 영상을 띄워 노래하는 화자의 깊이 있는 내면을 밀도 있게 전달했다.
해니건과 체코필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한 객원 지휘자가 아니라 노래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그는 체코필에 대해 “매우 감성적인 오케스트라로, 은유와 이미지를 소리로 다루는 걸 좋아한다. 저와 그 점에서 잘 맞았다”고 했다. 단 3일간의 짧은 리허설이었지만 마지막 날 리허설 직후 단원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지난 2일 공연에서 체코필 단원들은 그가 노래하며 지휘하는, 조지 거슈윈의 ‘걸 크레이지’ 모음곡에 맞춰 함께 노래했다. 체코필 단원들이 무대에서 직접 노래한 것은 전례 없는 광경이었다. “저에게도 오케스트라에도 즐거운 무대였습니다. 사랑을 찾는 설렘, 사랑에 빠졌을 때 오는 황홀함, 영혼을 가득 채우는 기쁨에 관한 곡이에요.”
한국과의 인연…한강, 진은숙, 박지윤
해니건은 한국 예술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작가 한강, 작곡가 진은숙,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 등이 그들이다. 그중 한강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영국 작곡가 로라 볼러가 한강의 소설 <흰>에서 텍스트를 가져와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고, 해니건이 이 곡의 세계 초연을 맡았다.
올해 1월 예테보리심포니와의 초연을 시작으로 런던심포니, 코펜하겐필하모닉과도 무대에 올렸다. 다음 시즌에는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뮌헨에서 다시 이 곡을 노래할 예정이다. 3월 런던심포니 공연에는 한강이 직접 찾았고, 해니건은 그 자리에서 작가와 처음 만났다. “언젠가 이 곡을 한국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가 그리는 앞날은 화려하기보다 단단하다. “앞으로도 멋진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음악을 하는 것이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