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아파트 건설 현장.  /사진=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아파트 건설 현장. /사진=연합뉴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릴 적 흙장난하며 부르던 이 노래가 요즘 서울 재건축 추진 아파트 거주자에게는 간절한 염원입니다. 서울 아파트 4채 중 1채는 이미 서른 살을 넘겼고, 신축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됐습니다. '이슬기의 새집다오'는 복잡한 재건축·재개발의 실타래를 풀고, 우리가 살고 싶은 '내일의 집'을 탐구합니다. 여러분의 '새집' 꿈이 선명해질 수 있도록 투명하고 쉽게 쓰겠습니다. [편집자주]

"자재비가 연일 치솟는다니 저가 자재 변경이나 날림 공사에 대한 걱정마저 들어요."

최근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서 이 같은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중동 전쟁으로 인해 국제 유가가 요동치자, 건설사가 원가 상승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저렴한 자재로 바꿔치기하거나 공기가 늘어날 수 있다는 걱정이 불거진 것입니다. 여기에 최근 한 대형 건설사가 사업지에 공기 연장 및 공사비 인상 관련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심이 쏠렸습니다.

5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현대건설은 최근 서울 은평구 대조1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조합(힐스테이트 메디알레)에 공문을 발송했습니다.

현대건설은 공문에서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촉발된 원자재 시장의 급격한 변동은 통상적인 사업 수행 과정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외부 변수"라며 "이는 도급계약서 제33조 제1항에서 정한 천재지변, 전쟁 등 불가항력의 경우에 해당해 공사기간 연장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이런 대외 여건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공사비에 대한 보전 방안도 함께 이뤄질 수 있도록 혜량해주시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LPG 운반선.  /사진=연합뉴스
호르무즈 해협 LPG 운반선. /사진=연합뉴스
지구 반대편의 전쟁이 한국 아파트의 공사비를 결정하는 핵심 고리는 바로 '나프타'입니다. '석유화학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는 원유를 증류해 추출합니다.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폴리염화비닐(PVC), 페인트, 단열재용 폴리우레탄, 각종 접착제는 아파트 마감 공사의 필수 자재입니다. 레미콘을 제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혼화제 역시 나프타를 분해해 만듭니다. 유가가 오르면 이들 자재의 제조 원가가 뛰고, 현장의 장비를 움직이는 '디젤(경유)' 가격과 운송비도 상승합니다. 건설업계가 원유 가격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원구원 연구위원은 "건설 현장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곳이 아니라 외부에서 만든 물건을 가져와 조립하는 곳"이라며 공급망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다만 건설업계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모든 현장이 '대조1구역'처럼 비상벨이 켜진 상황은 아닙니다. 현장마다 공정률이 다르고, 그러다 보면 당장 필요한 자재도 모두 달라 사업장에 따라 체감 온도가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중동 전쟁에 대해 언급한 공문을 보낸 현대건설 역시 모든 사업장에 같은 공문을 보낸 것은 아닙니다. 현대건설 측은 모든 사업장에 "중동 전쟁 및 제도 변화에 따라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상황을 발주처와 공유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해 차질 없이 공정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한 상황입니다.
은평 대조1구역.  /사진=연합뉴스
은평 대조1구역. /사진=연합뉴스
최근 공사비 인상 이슈가 불거진 사업장들의 경우, 전쟁의 여파보다는 각 현장의 고유한 원인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는 게 업계 중론입니다.

대조1구역은 서울 은평구의 재개발 대어로 꼽히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조합 내분과 집행부 공백으로 공사비 지급이 중단되는 등 파행을 겪어온 곳입니다. 이번 공문 역시 지난 2월 이미 요구한 '222억원 증액'의 후속 조치로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대조1구역은 현재 골조가 다 올라가고 마감 공정이 진행 중인데, 페인트 등 마감재 수급이 불안정해 상승 요인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최근 공사비 인상 관련 공문을 받은 '마천4구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대건설은 최근 마천4구역 재개발조합에 기존 공사비에서 75.6%가 늘어난 2900억원 수준의 공사비 증액을 요청했습니다. 기존 공사비는 3.3㎡당 584만원인데, 이는 최근 서울 시내 주요 정비사업의 통상적인 공사비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당초 공사비가 산출된 시점이 2021년 7월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건설 측은 "2021년 이후 급변한 건설 환경에 따른 물가 상승과 설계 변경 등을 반영했다"며 "최근 서울 시내 주요 정비사업의 통상적인 평당 공사비에 준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건설업계 전반에선 중동 전쟁 여파에 차분히 대응책 마련에 나선 분위기입니다.

A 건설사 관계자는 "당장 실질적 피해는 없고, 사태가 3~4개월 지속될 경우를 대비해 대응책을 준비하는 단계"라고 밝혔습니다. 이 관계자는 "과거 철근·콘크리트 대란 등을 겪으며 쌓인 노하우가 있다"며 "지금으로서는 일부 비축분도 있고, 비슷한 공정률을 보이는 현장끼리 자재를 빌려 쓰는 등 영업적 노하우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B 건설사 관계자 역시 "일부 현장의 일을 두고 모든 현장이 난리가 난 것처럼 보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새집 들어갈 날 기다렸는데…요즘 현장 분위기 심상치 않다 [이슬기의 새집다오]
현재 공사비 갈등을 겪는 곳은 전쟁이라는 외부 변수 때문이라기보다, 이미 발생한 인상 요인이 마침 전쟁이 터진 시점에 수면 위로 드러난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는 설명입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동 전쟁을 모든 공사비 인상의 직접적 원인으로 결부할 수는 없다"며 "부실 공사 공포로 연결 짓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하면 상황이 급변할 가능성까지 배제할 순 없습니다.

이 연구위원은 "전쟁의 단기 종결이 어려운 현 상황에서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부과 등이 현실화하면 원유 도입 비용과 환율이 동시에 뛰는 가중요인이 발생한다"며 "특히 현장 장비와 운송 트럭이 모두 디젤 기반이라 운영비가 즉각 상승하고, 재고가 적은 레미콘 혼화제 등 화학 자재의 수급이 끊기면 공사 자체가 멈추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다만 건설사 측의 입장인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 사유'를 인정받는 문제와 관련해선 "과거 코로나19 사태나 러·우 전쟁 당시에도 불가항력 사유로 인정받지 못한 선례가 있는 만큼, 실제 증액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민사소송 판례나 상위기관의 공식적인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