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가 ‘위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굳이 원래대로 번역하자면 요크셔 지방 사투리 식으로 ‘(바람이) 웅웅거리는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집’이지만 작품 맥락상 고유명사이다. 극의 주요 공간인 언쇼 가(家) 저택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전문 번역가의 말대로 『폭풍의 언덕』은 영어 원제인 『위더링 하이츠』로 그냥 두는 게 맞는 말이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1847년 발표된 이후 180년간 세계인의 필독서가 된 소설이다. 영화는 이번까지 모두 여덟 편이며 그중 원작의 어두운 고딕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린 대표작으로는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가 만든 로렌스 올리비에, 멀 오베런 주연의 1939년 작이 꼽힌다. 사람마다 개인 취향이 다르겠으나 피터 코스민스키 감독, 랄프 파인즈, 줄리엣 비노슈 주연 버전(1992)도 좋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안드레아 아놀드의 작품(2011) 또한 상찬을 얻었다. 여주인공 역의 카야 스코델라리오는 의도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마치 에밀리 브론테를 연상케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 ⓒWarner Bros, 출처. IMDb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 ⓒWarner Bros, 출처. IMDb
<폭풍의 언덕>은 남자 주인공 히스클리프의 어두운 내면이 어떻게 그려지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가 작품의 평가를 결정짓는 영화이다. 이번의 여덟 번째 시도는 어떻게 평가받을까. 에메랄드 페넬 감독이 만든 이번 2026년 영화는, 일명 ‘죽거나 나쁘거나’식 반응을 얻을 것이다. 원작에 대한 과감한 해석을 시도한 영화라는 평가를 얻거나, 반대로 원작을 가장 형편없게 만든 망작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렇게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엇갈리게 되는 데에는 에메랄드 페넬이라는 감독의 독특하고 정치적인 성 정체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페넬은 여성주의의 전투성을 의도적으로라도 강하게 내비치는 감독이다.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 톰 후퍼가 연출한 <대니쉬 걸>의 배우 출신인 이 여성 감독은 <프라미싱 영 우먼>(2021)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마치 니콜라스 뢰그 감독, 테레사 러셀 주연의 <배드 타이밍>(1980)을 켄 러셀 감독, 캐서린 터너 주연의 <크라임 오브 패션>(1984)과 뒤섞고, 거기에 B급 비디오 영화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1978)와 프랑스 영화 <베즈무아: 거친 그녀들>(2000)의 분위기를 토핑처럼 얹은 후,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립스틱>(1981)이 보여 준 폭력의 수위를 차용하여 여성의 잔혹한 난동 살인극을 그려 나간 내용이었다. 감독 에메랄드 페넬은 그런 식으로 남성주의의 파산과 새로운 여성주의를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선언하기를 즐기는 감독이다. 이번 <폭풍의 언덕>도 그 같은 범주, 그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여성주의 감독답게 원작인 『폭풍의 언덕』의 중심을 남자 주인공 히스클리프에서 여자 주인공 캐서린으로 옮겼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작의 남녀 주·조연의 주도권을 바꾸고 그 성적 역할을 변화시켰다. 그것이 옳았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는 아마도 해외와 국내의 흥행 지수가 가늠할 것이다. 일단 관객들 상당수가 많이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원작은 언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히스클리프가 아버지로부터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학대 속에 성장하면서도 그 집 딸인 캐서린을 흠모하다가, 여자가 부의 상속을 노리며 린튼 가의 남자와 결혼하자 복수에 눈이 멀어 두 가문 모두에게 가혹한 복수를 이어 간다는 이야기이다. 원작의 핵심은 사랑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다. 바로 ‘애증’이다. 사랑과 증오 사이의 미묘하고 복잡한 경계를 문학이라는 서사로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낸 작품이 바로 『폭풍의 언덕』이었으며, 따라서 영화는 그 가느다란 선의 심리를 누가, 그리고 어떻게 올바로 그려내느냐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감독 에머랄드 펜넬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증보다는)여성의 심리적 갈등이라며 작품을 바꿔 썼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더욱 중요한 것은 원작이 보여 줬던 시대의 어두운 아우라이다. 원작이 나왔던 1847년은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영국 산업혁명이 절정에 이른 시기로 한바탕의 회오리가 계속되던 때였으며, 봉건 영주의 몰락과 신흥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의 급부상, 그야말로 노동계급의 출현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위더링 하이츠’가 있는 요크셔는 영국 북부의 중심 공업지대였다. 그 유명한 역사, 곧 방적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잔혹한 시대였다. 1844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산업혁명기’란 경제학적 용어가 나왔고, 엥겔스는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바야흐로 1848년의 『공산당 선언』으로 당시의 시대가 전복(顚覆)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던 때였다.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 소설은 이 모든 정치·사회적 상황을 포함하되 그것을 문학적으로, 마치 셰익스피어가 그린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의 갈등을 고딕의 시대로 치환시키듯 언쇼 가와 린튼 가의 이야기, 또 그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려 버둥댔던 리버풀 출신 한 젊은 남자의 얘기를 어둡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에메랄드 페넬은 이런 분위기를 싹 걷어 냈다. 원작을 잘 알고 있는 관객들일수록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부 관객들의 입에서는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을 다 망쳐 버렸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에메랄드 페넬이 대신 주목한 건 캐서린의 성적 욕망이다. 페넬에 의해 탄생한 영화 <폭풍의 언덕>은 브론테의 소설을 섹스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감독의 파격적인 의지가 담겨 있다. 단순한 가정만이 아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심보다는 캐서린의 성적 욕망이 더욱 소중하고, 더욱 정당하며, 더욱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 감독 에메랄드 페넬판 <폭풍의 언덕>이다. 처음에는 마고 로비를 캐서린 역으로 캐스팅한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캐서린 역을 하기에 마고 로비는 과하게 풍만하고 체격이 있어 보인다. 어깨가 떡 벌어졌다. 그러나 극 중에서 점점 더 성욕을 강하게 내비치기에는 가냘픈 몸매보다는 일정 정도 육중한 느낌이 더 낫다는 연출의 의도가 개입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게 더 18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고 봤을 것이다. 히스클리프 역은 상대적으로 신예급인 제이콥 엘로디를 선택했으며, 196cm라는 장신의 야수성을 드러내게 하는 데 적격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 ⓒWarner Bros, 출처. IMDb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 ⓒWarner Bros, 출처. IMDb
시대의 아우라를 적확하게 그려낸 대목은 오프닝 씬(scene)뿐이다. 교수형 당하는 남자를 마치 공연을 보듯 군중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즐기는 장면이다. 한 남자아이는 대롱대롱 매달려 끅끅대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죽어 가는 남자가 발기했다고 소리친다. (교수형 당할 때의 대체적인 신체 반응으로 알려져 있다) 남자와 여자는 주위에 만연한 폭력성, 죽음을 직접 목격한 것으로 인해 잔뜩 흥분한 상태로 거리에서 섹스를 벌이려 한다. 이 오프닝 씬은 (사회적) 폭력의 분위기와 (인간의) 섹스 욕망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따라서 이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가려 하는지를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에머랄드 펜넬은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에 숨겨져 있는 여자와 남자, 특히 여자의 성적 욕망을 밝혀내려 애쓰고 있다. 그 같은 노력이 원작을 훼손한 것인지, 원작에 대한 재해석인지는 평가가 엇갈릴 것이다. 만약 브론테의 원작을 읽지 않았거나 원작의 의미를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젊은 관객들이라면 소설 『폭풍의 언덕』이란, 여자 캐서린이 남자 히스클리프를 데리고 마구간에서, 폭풍우 몰아치는 언덕에서, 마차 안에서, 들판 한가운데에서 온통 ‘섹스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할 공산도 크다. 그건 그리 좋은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캐서린의 폭력적인 아버지 미스터 언쇼(마틴 클룬즈)나 린튼 가의 에드거 린튼(샤자드 라티프) 그리고 린튼의 여동생이자 히스클리프가 복수를 위해 이용하는 여자 이사벨라(앨리슨 올리버), 무엇보다 캐서린이 어릴 적부터 함께 살아 온 말벗이자 몸종인 넬리(홍 차우)의 캐릭터들을 의도적으로 단편적이고 평면적으로 만들었다. 그 모든 것 대신 오로지 캐서린을 주목하며 18세기 여성(들)의 성적, 사회적, 계급적 욕망이 어떤 식으로 차별받고 억압됐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건 다분히 과도하게 전투적이다. 선뜻 동의하기 힘든 지점이 있다. 그런 점들을 의식한 듯 영화의 촬영과 미장센, 의상 등은 혀를 내두를 만큼의 완성도와 제작비를 쏟아부었다. 그 점이 눈에 띄지만, 그렇게 그 점이 눈에 띄는 것이 오히려 영화 전체에 집중하기 힘들게 하기도 한다. 영화가 원작을 능가하기란 어렵다. 고전 소설인 경우는 더하다. 무릇 영화의 상상력은 문학의 상상력을 따라가 본 적이 없다.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