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은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다. 카니발은 서양 가톨릭 문화권에서 사순절 직전에 열리는 축제로, 그 시기는 대체로 2월이다. 카니발의 기원은 고대 로마인의 축제인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로 여겨진다. 이것은 동지(冬至)쯤의 축제로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감사하던 행사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축제 기간에 사회의 약자는 강자를 놀려줄 수 있었고, 노예도 주인처럼 행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투르날리아는 일 년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중세에 접어들면서 교황청은 이러한 이교도의 축제를 완전히 없애기보다는 교회력 속으로 흡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리하여 사투르날리아는 기독교 절기 행사에 접목되었고, 축제일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육식을 금하며 경건하게 지내야 하는 사순절 직전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영어 ‘카니발(carnival)’과 프랑스어 ‘카르나발(carnaval)’은 이탈리아에서 온 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카르네발레(carnevale)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고기여, 안녕’이란 뜻의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비아 델 코르소의 카니발 행렬 / 사진. © 정태남
비아 델 코르소의 카니발 행렬 / 사진. © 정태남
로마의 카니발 중심 무대 ‘비아 델 코르소’

이탈리아에서 카니발이라면 가면 축제로 유명한 베네치아 카니발과 정치를 풍자하는 가장행렬 축제로 유명한 비아레지오의 카니발을 가장 먼저 손꼽는다. 로마의 카니발은 오랫동안 시들해졌다가 최근에 서서히 부활하고 있지만 180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베네치아 카니발 못지않게 유명했다.

로마의 카니발이라면 로마 중심가의 동맥인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거리는 남쪽의 베네치아 광장과 북쪽의 포폴로 광장을 연결하는 1.6 킬로미터 정도의 길로, ‘로마로 통하는 모든 길’ 중 하나였던 비아 플라미니아(Via Flaminia)의 첫 구간에 해당한다. 비아 플라미니아는 기원전 220년에 건설된 도로인데, 로마의 중심부와 이탈리아 동북부 해안 도시 리미니까지 장장 329킬로미터의 거리를 연결했다.
비아 델 코르소의 카니발 행렬.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군의 행진을 재현했다. / 사진. © 정태남
비아 델 코르소의 카니발 행렬.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군의 행진을 재현했다. / 사진. © 정태남
비아 델 코르소 거리는 중세에 비아 라타(Via Lata)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1466년 교황 파울루스 2세가 로마 카니발 행사의 하나로 이 거리에서 야생말 경주를 하도록 한 이래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즉 비아 델 코르소는 ‘경주(競走)의 거리’라는 뜻이다. 한편 야생말 경주는 당시 로마의 북쪽 관문이던 포폴로 광장에서 출발하여 비아 델 코르소를 달려 베네치아 광장까지 달리는 것이었는데, 로마의 카니발 행사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 길 중간쯤에 있는 콜론나 광장에서는 카니발 불꽃놀이 행사가 열리곤 했다. 이와 같이 로마의 카니발 중심 무대가 된 곳은 바로 비아 델 코르소였다. 그러니 길 양쪽에 세워진 귀족 소유의 건물의 창과 발코니는 귀족들을 위한 관객석이었던 것이다.
포폴로 광장의 카니발 행사. 쌍둥이 성당 사잇길이 비아 델 코르소이다. / 사진. © 정태남
포폴로 광장의 카니발 행사. 쌍둥이 성당 사잇길이 비아 델 코르소이다. / 사진. © 정태남
로마의 베를리오즈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로마대상(Prix de Rome)을 받고 1831년 12월 30일 로마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생활에는 별로 애착이 없었고 로마의 음악적 환경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마 체류 시절 베를리오즈의 초상화 (프랑스 화가 에밀 시뇰의 작품) / 출처. Wikimedia Commons
로마 체류 시절 베를리오즈의 초상화 (프랑스 화가 에밀 시뇰의 작품) /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는 로마 체류 기간 중에는 이렇다 할 곡은 하나도 쓰지 않다가 파리로 돌아간 다음 1834년에 비로소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를 구상했다. 이때 시작하여 4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 <벤베누토 첼리니>이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1500년 피렌체 태생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유명한 보석 공예가이자 조각가였다. 이 오페라는 첼리니가 로마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532년 카니발 기간 중에 벌어지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인데 공연 시간은 거의 3시간에 이른다. 그런데 베를리오즈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하고 투자하여 무대에 올린 이 오페라는 완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금전적 손실도 막심했다.

하지만 아까운 작품을 그대로 모두 버릴 수는 없는 법. 5년 후에 그는 생각을 달리하고 자기가 쓴 오페라 중 몇 군데를 발췌하여 새로운 ‘제품’을 구상했다. 즉 이 오페라 1악장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창과 불꽃놀이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묘사한 곡을 되살려 10분이 넘지 않는 정도 길이의 완전히 새로운 관현악곡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카니발,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 (Le carnaval romain, ouverture pour orchestre Op.9)>이다. 베를리오즈는 이 곡을 카니발 기간이던 1844년 2월 3일 파리에서 초연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후 그는 연주 여행 가는 곳마다 이 곡을 연주하면서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으니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에서 입은 손실을 완전히 만회할 수 있었던 셈이다.
로마 카니발 행사 진행자들 / 사진. © 정태남
로마 카니발 행사 진행자들 / 사진. © 정태남
쪽박에서 대박으로

이 곡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했던 요인을 분석해 보면, 성악곡을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음색의 오케스트라 곡으로 변모시킨 베를리오즈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제목이 차지하는 몫이 컸다고 생각된다. 당시 로마의 카니발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이 작품의 제목만으로도 대중의 호기심을 쉽게 자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곡은 야생말의 질주, 가장행렬, 불꽃놀이, 군중의 환호 같은 장면들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드는 극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 하나의 성공 요인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적절한 연주 시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 곡을 들으며 졸았다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작가

[♪베를리오즈 <로마의 카니발,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베를린 필하모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