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Bonnie & Clyde)>(극작 이반 멘첼, 작곡 프랭크 와일드혼)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 실존한 두 인물 보니 파커(Bonnie Parker)와 클라이드 배로우(Clyde Barrow)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던 보니와 갱스터가 되기를 열망했던 클라이드는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한 현실 속에서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 차량 절도와 강도를 거듭하며 세상을 뒤흔들었다. 대공황기의 불황과 혼란 속에서 파격적인 행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보니와 클라이드는 세련된 패션으로 고급 자동차를 훔쳐 타고 다니며 당시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범죄를 넘어 치명적인 로맨스로 끊임없이 재조명되며 1967년 할리우드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로 제작되었다. 국내에서 2011년 발매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현아와 장현승의 합동 유닛 그룹 트러블메이커의 <Trouble Maker> 또한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 2011년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되어 유럽, 일본 등에서 공연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13년, 2014년 상연되었다. 이번 공연은 11년 만의 삼연(2025.12.11~2026.03.02)이며 새로운 프로덕션(쇼노트)으로 돌아왔다. 2022년 웨스트엔드에서도 상연되었으며, 호주, 브라질, 덴마크 등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고 있다. 국내 연출은 김태형이 맡았으며, 클라이드 역에는 조형균, 윤현민, 배나라가, 보니 역에는 옥주현, 이봄소리, 홍금비가 캐스팅되었다.
보니 앤 클라이드, 그들이 반복해서 소환되는 이유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공연 장면. [좌측부터] 홍금비(보니 역), 배나라(클라이드 역) / 제공. (주)쇼노트
극은 보니와 클라이드의 죽음으로 시작해, 그들이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역순으로 보여주는 구성이다. 온몸이 피로 물든 보니와 클라이드가 각각 할리우드 배우와 갱스터를 꿈꾸는 것이 명시되며, 이들의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클라이드의 형 벅과 그의 아내 블랜치를 제외한 모든 인물은 모두 첫 등장부터 마치 마리오네트와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작품은 움직임으로 보니와 클라이드(벅과 블랜치까지)와 그 외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전자는 불공평하고 희망 없는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 했던 인물들로, 사회에 실이 묶인 마리오네트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를 따라 움직이는 주체로 그려진다. 한편, 후자는 비관만이 가득한 사회를 살아감에도 불만을 간직한 채 그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으로 사회의 규칙과 법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마리오네트로 표현된다. 그러나 연출이 보니와 클라이드를 긍정적으로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규격화된 삶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보니와 클라이드의 삶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며, 살인의 순간 이미 그들은 이제 ‘자유와 꿈을 찾는 청년’이 아닌 ‘살인까지 한 범죄자’로 규정된다.
배나라는 힘 있는 창법과 강렬한 연기로 세상에 대한 반항이 가득하면서도 멋진 갱스터가 되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한 클라이드를 연기한다. 홍금비는 처음부터 할리우드 배우를 꿈꿨으나, 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 결코 이룰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보니를 표현한다. 이에 극이 전개되면서 계속 반복되는 클라이드의 욕망은 점점 더 거세지며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보니의 욕망은 공허하면서 비탄적이다. 김찬호는 벅을 천진난만하게 그려내어 보니와 클라이드의 범죄 행각을 철부지 혹은 사회 부적응자들이 하는 위험천만한 하나의 게임처럼 보이게 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물의 온도 차는, 욕망을 어떻게 실현해 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하면서도, 이 작품이 끝내 이에 있어 단일한 정답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보여준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공연 장면. [좌측부터] 옥주현(보니 역), 조형균(클라이드 역) / 제공. (주)쇼노트
인간은 모두 나름대로 자신만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를 목표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며, 꿈을 이룬 미래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그대로 살아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생이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을 쉽게 주지 않기 때문에 아마 이상향을 현실로 만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경제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 남성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으며,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 자아실현이나 자아 정체성 탐구는 배부른 소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시대도 이와 다르지 않다. AI의 급진적인 발전과 점점 침체되는 경제 상황 속에서 청년들은 일자리를 잃어가고 구직은 힘들어지며 청년들은 자신이 꿈꾸던 삶을 위한 첫걸음조차 떼지 못한 채 좌초되어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노하는 존재이다. 말 못 하는 아기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생떼를 부리며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보니와 클라이드는 단순히 분노하는 데서 멈춘 것이 아니라, 분노를 해결할 방법으로 ‘총’을 선택한다. 총은 그들이 원하던 명성을 다른 방식으로나마 얻게 해주는 도구이다. 명성의 유형이나 성격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보니는 자신의 시를 신문사에 보내고, 보니와 클라이드는 자신들의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경찰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며 지속적으로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와중에도 열심히 자신들의 사진을 직접 찍는다.
‘직접 사진을 찍어 자신들의 삶을 기록 혹은 포장하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모습은 다소 기괴하게 보이기도 한다.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직접 기록하고, 실상은 별 볼 일 없는 범죄자이자 도피 생활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면서도 사회 체제에 반기를 들어 성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그려내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해진 작금의 시대가 읽히며 SNS에 집착하며, 진실한 삶이 아닌 화려하게 꾸며낸 삶을 사는 청년들의 모습을 무대와 현실의 교차를 통해 중복시킨다. 이 작품이 반복해서 호출되는 이유는, 단순히 범죄와 로맨스 때문이 아니다. 주체가 되려는 욕망이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즉흥성과 불안 사이의 음악적 초상
보니와 클라이드의 삶은 거짓된 것이며 그렇기에 불안하다. 처음 그들이 사랑에 빠지고, 비교적 가벼운 범죄를 일으킨 이유는 꿈에 다가가기 위한 여정의 시작으로서였다. 그러나 꿈에 닿으려 할수록 이들은 모순적으로 꿈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한곳에 정착해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과, 동시에 꿈을 이룰 수 없음을 한편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보니와 클라이드 내면의 목소리를 반영하듯 이 작품 음악의 멜로디 또한 다소 불안하다. <지킬 앤 하이드>, <웃는 남자>, <드라큘라> 등 수많은 뮤지컬에서 대개 빅멜로디를 명징하게 쓰던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업 방식과 달리,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는 빅멜로디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음악은 감정을 폭발하기보다는, 안정적인 종지를 의도적으로 미루고, 계속 앞으로 밀어붙이는 리듬과 상승하는 멜로디를 사용해 보니와 클라이드의 아슬아슬한 도주 생활을 보여준다.
프롤로그 넘버에서부터 넘버 ‘This World Will Remember Me’의 멜로디가 보니와 클라이드 각각에게서 흘러나온다. 보니는 엄마한테 오디션 “한 방이면 돼”라고 이야기하며 인생의 극적 전환을 꿈꾸고, 클라이드는 “총이면 된다”라고 말하며 총만 있으면 인생이 쉬워짐을 몸소 경험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나갈 것임을 이야기한다. 넘버 ‘This World Will Remember Me’가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보니를 우연히 만난 클라이드가 그녀에게 자신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이야기할 때이다. 클라이드의 ‘총’은 단 ‘한 발’의 총알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니의 인생 방향인 ‘한 방’과 유사하다. 이에 결국 두 사람은 비슷한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이후 넘버의 멜로디는 제목을 ‘This World Will Remember Us’로 바뀌어 보다 전개된다. 보니가 클라이드의 탈옥을 도우며 본격적으로 이 둘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공연 장면. [좌측부터] 배나라(클라이드 역), 홍금비(보니 역) / 제공. (주)쇼노트
작품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이 멜로디가 나오며 클라이드가 “부서진 엔진에 시동이 걸렸어. 으르렁대니 또 설레네. 괜찮다면 시작할게. 나를 기억하게 해 줄게”라 말하고, 바로 뒤이어 같은 멜로디에 보니가 편승하여 “내 꿈 알잖아. 저기 할리웃. 날 불러 가고 싶어, 아냐, 잠깐. 내가 이래도 될까?”라 말하며 이 두 사람이 이제는 각자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단순히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시궁창 같던 현실을 빠르게 돌파하기 위한 정신적 동반자를 만난 것이다. 작품은 이들의 행보에 있어 도덕적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으며, 보니와 클라이드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대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This World Will Remember Us(세상은 우리를 기억할 거야)’라는 메인 넘버의 제목처럼, 관객은 극 중 가장 중독성 있는 이 멜로디로 대표되는 보니와 클라이드에게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공연 장면. [좌측부터] 이봄소리(보니 역), 윤현민(클라이드 역) / 제공. (주)쇼노트
더불어 보니가 누군가 앞에서 처음 노래 부르는 넘버 ‘How ’Bout a Dance’는 단순히 춤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후, 이 넘버는 보니와 클라이드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도피하다 잠시 숨을 고를 때부터 총격전이 이어질 때까지 리프라이즈된다. 이 넘버는 컨트리, 포크, 블루스가 섞여 불안한 현실은 잊고 잠시 춤을 추며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이는 보니와 클라이드,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흘러나오는 이 음악은 이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시작했던 일이 결국은 그들이 가장 원했던 삶의 반대편으로 이끌었음을 모순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넘버를 포함해 작품의 주요 음악은 서로 태생적으로 얽혀 있는 재즈, 블루스, 컨트리 등으로 되어 있다. 반복적으로 기존의 규범을 깨는 전위예술의 상징인 재즈의 즉흥연주와 스윙 리듬은 자유를 열망하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모습을 강조한다.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인종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노동요인 블루스는 인종차별, 빈곤, 연애, 일상적 좌절과 생존의 경험이 직설적으로 담고 있다. 슬픔을 노래하면서 버티던 역사가 있는 블루스는 이 작품에서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하면서도 회피하지 않으려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부 백인 노동 계급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음악인 컨트리는 경제 대공황 속 실업과 빈곤, 가족 해체 등을 표상하면서도, 방랑하는 삶 속 계속해서 가족(고향)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보니와 클라이드의 노스텔지어를 함유한다.
끝내 도착하지 않은 구원: 블랜치와 테드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공연 장면. [가장 우측부터] 이봄소리(보니 역), 윤현민(클라이드 역) [가운데] 이제우 (목사 역) / 제공. (주)쇼노트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는 보니와 클라이드, 그리고 이들을 추적하는 경찰의 이야기로 크게 구성되어 있지만, 작품의 윤리적 질문은 언제나 주변부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극 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목사의 넘버 ‘God’s Arms are Always Open’, ‘Made in America’는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기독교적 가치가 이들의 범죄 앞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를 환기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설교는 점차 힘을 잃고 사람들은 보니와 클라이드의 여정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도덕의 목소리를 무대 중앙이 아닌 가장 연약한 인물, 블랜치에게 맡긴다. 블랜치는 탈옥한 벅을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려 애쓰고, 그가 클라이드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지해 주고 이끄는 인물이다. 신앙과 사랑을 동시에 품고 있는 그는 벅에게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을 끝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나 벅은 끝내 클라이드를 향한 동경과 내면의 충동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범죄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블랜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그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금기를 넘는다. 총격전 속에서 벅이 죽고, 블랜치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작품은 가장 도덕적이었던 인물이 비자발적인 방식으로 범죄자가 되는 장면을 제시한다. 벅에 대한 그녀의 신실한 믿음과 사랑으로 블랜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하지 않았지만, 보니와 클라이드의 범죄 행위에 동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이때 공허하게 리프라이즈되는 ‘God’s Arms are Always Open’는 구원을 약속하는 노래가 아니라, 더 이상 도착하지 않는 구원의 잔향처럼 울린다.
보니를 짝사랑했던 경찰관 테드 힌튼 역시 이 윤리적 균열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인물이다. 다른 경찰들이 보니와 클라이드를 무조건적인 ‘악’으로 규정하는 데 반해, 테드는 “보니는 원래 순수하고 착한 아이”라며 그녀를 끝까지 다르게 바라본다. 그는 클라이드가 보니의 인생을 망쳤다고 믿으며 그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보니만큼은 교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놓지 않으며 자신이 그녀를 구할 것이라 다짐한다. 그러나 보니는 신문사에 자신의 시를 보내고, 범죄 과정에서 오히려 클라이드보다 앞서는 모습을 보이며 테드의 기대와는 다른 선택을 거듭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변화할 수 있으리라 믿는 테드의 태도는 결말의 방향성은 다르지만, 벅을 향한 블랜치의 믿음과 닮아 있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공연 장면. [좌측부터] 김찬호(벅 역), 배수정(블랜치 역) / 제공. (주)쇼노트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공연 장면. 권성찬(테드 역) / 제공. (주)쇼노트
블랜치와 테드의 존재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선택을 정당화하지도, 그렇다고 쉽게 단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블랜치와 테드의 사랑과 믿음마저 무력화시키는 시대와 사회의 압력을 전면에 드러내며 질문을 관객에게 되돌려 놓는다. 신실함은 왜 끝내 구원이 되지 못했는가, 단순히 보니와 클라이드를 비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이들을 단순한 범죄자로만 규정할 수 있는가.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는 끝내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총성이 멎은 자리에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불편한 질문 하나를 남긴 채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