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Granada)는 오랜 역사와 문명이 겹겹이 쌓인 도시다. 이 도시의 구심점에 자리한 알함브라(Alhambra)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볼 수 있는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특히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árrega, 1852~1909)의 클래식 기타 명곡 <알함브라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을 통해서도 전 세계인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한편 ‘알함브라’라는 이름은 ‘붉은 것’을 뜻하는 아랍어 알-함라(al-Ḥamrā’)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그스름한 외벽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스페인어에서는 ‘h’가 묵음이기 때문에 ‘알람브라’로 발음되지만, 그 어원이 아랍어임을 떠올리면 ‘알함브라’라는 명칭이 오히려 이 건축의 정체성을 더 정확히 드러내는 것 같다.
알함브라. 이베리아 반도에 세워진 이슬람 건축의 백미이다. / 사진. © 정태남
알함브라. 이베리아 반도에 세워진 이슬람 건축의 백미이다. / 사진. © 정태남
낙원을 닮은 공간

알함브라는 군사용 요새인 알카사바(Alcazaba), 나스르(Nasr) 왕조의 궁전,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카를로스 5세 궁전, 그리고 언덕 위 여름 별궁 헤네랄리페(Generalife)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카를로스 5세 궁전을 제외한 핵심 공간은 모두 13~14세기에 건설된 이슬람 건축이다.

알함브라에서는 이슬람이 상상한 낙원의 이미지를 지상에 구현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꾸란에 묘사된 낙원은 흐르는 물, 그늘진 정원, 반복과 질서 속의 무한한 조화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알함브라는 이 상상력을 돌과 물, 빛과 문양으로 번역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스르 궁전 안 집무공간 앞의 파티오. 작은 분수와 연못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 사진. © 정태남
나스르 궁전 안 집무공간 앞의 파티오. 작은 분수와 연못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 사진. © 정태남
특히 알함브라의 핵심부인 나스르 궁전의 내부를 보면, 외관의 우람한 요새적 인상과 달리 놀라울 만큼 친밀하고 섬세하다. 특히 파티오(Patio 스페인식 안뜰)의 작은 분수와 연못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주변의 벽과 아치에는 기하학 문양과 ‘오직 신(알라)만이 승리자이다’라는 이슬람 경구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장식은 구조가 되며 구조는 다시 빛의 리듬으로 변한다. 낮에는 햇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천장의 문양을 흔들고, 저녁 무렵에는 물결의 잔광이 벽을 따라 흐른다. 이 공간은 인간의 권력을 과시하기보다, 신의 무한성과 질서를 암시한다. 알함브라는 군주의 거처라기보다, 유한한 인간이 상상한 낙원의 모형에 가깝다.
나스르 궁전 안 ‘사자의 파티오’ 주변의 섬세한 벽과 기둥. / 사진. © 정태남
나스르 궁전 안 ‘사자의 파티오’ 주변의 섬세한 벽과 기둥. / 사진. © 정태남
나스르 궁전 내실의 섬세하게 장식된 천장. / 사진. © 정태남
나스르 궁전 내실의 섬세하게 장식된 천장. / 사진. © 정태남
한 알함브라와 헤네랄리페는 이러한 낙원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확장한다. 헤네랄리페는 여름철 왕들이 머물던 별궁이지만, 그 본질은 ‘시선의 정원’이다. 언덕 위 테라스의 창과 아치, 수로와 길은 모두 특정한 방향으로 시선을 이끌며, 그 끝에는 언제나 알함브라의 성벽이 놓인다. 알함브라는 이 순간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헤네랄리페라는 공간의 일부로 차용된 풍경이 된다. 이는 자연과 외부 경관을 건축 안으로 끌어들이는 한국 전통건축의 ‘차경(借景)’ 미학과도 깊이 닮아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찬란한 이슬람 건축물이 어떻게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헤네랄리페에서 내려다 본 알함브라와 그라나다 시가지 / 사진. © 정태남
헤네랄리페에서 내려다 본 알함브라와 그라나다 시가지 / 사진. © 정태남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와 알함브라

그러면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를 간단히 훑어보자. 이베리아 반도는 고대에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다가, 기원전 3세기 로마에 정복되어 ‘히스파니아(Hispania)’라는 이름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5세기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이곳에 왕국을 세웠다. 역사의 큰 전환점은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반도를 침입하면서 찾아왔다. 이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북부로 밀려난 기독교 세력은 여러 작은 왕국을 세우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긴 투쟁 레콩키스타(Reconquista), 즉 ‘국토회복전쟁’에 돌입했다. 중심이 된 세력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었다. 수 세기에 걸친 공방 끝에 기독교 세력은 점차 남하했고, 마침내 그라나다 토후국만을 남겨두게 된다. 이때 알함브라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최후의 날이 점점 더 다가 다가오는데도 알함브라는 오히려 더 찬란한 모습으로 가꾸어졌다. 마치 ‘이슬람 건축과 예술의 결정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만방에 보여주려고나 한 듯.

그 후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의 결혼으로 두 왕국은 통합되었고, 이 부부 기독교 군주는 1492년 1월 2일 마침내 그라나다를 함락했다. 이로써 약 800년에 이르는 이슬람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그라나다에서 쫓겨난 이슬람 나스르(Nasr)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압딜은 ‘잃어버린 천국’ 알함브라를 멀리서 뒤돌아보며 탄식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알함브라의 야경 / 사진. © 정태남
알함브라의 야경 / 사진. © 정태남
폐허에서 되살아난 ‘낙원’

그라나다 함락 이후 알함브라는 한동안 기독교 왕들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버려졌다. 18세기에는 지붕이 무너지고 벽화가 벗겨진 폐허가 되었다. 심지어 카를로스 5세 궁전도 미완공인 채로 팽개쳐져 있었다. 잊혀진 알함브라를 다시 ‘낙원’으로 불러낸 것은 19세기 낭만주의였다. 미국의 외교관이자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은 1829년 알함브라에 머물며 <알함브라 이야기> (1832)를 집필했다. 그의 글은 이 폐허를 ‘잃어버린 문명의 낙원’으로 재해석했고, 유럽의 예술가와 여행자들을 그라나다로 불러들였다.

이 흐름 속에서 스페인 정부는 1870년 알함브라를 국가기념물로 지정하고 본격적인 복원에 착수했다. 복원이 많이 진행되어 알함브라의 찬란한 옛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던 시기인 1896년, 프란시스코 타레가는 그라나다를 방문해 이곳에서 받은 인상을 악보에 옮기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명곡이 <알함브라의 추억>이다. 연주 시간 5분도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곡은 트레몰로 주법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사라진 낙원을 붙잡으려는 기억의 진동처럼 들리기도 한다.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