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 통보받고 패닉”…27년차 ‘1호 웨딩플래너’의 고백 [권용훈의 직업불만족(族)]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파혼 통보 받으면 며칠 밤을 뜬눈으로 보냅니다”
정효진 메리앤메리 대표는 우리나라 1세대 웨딩플래너로 불린다. 1990년대 말, 웨딩플래너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업계에 발을 들였고 약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업계를 지키고 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잃은 뒤 청담동에서 신부 메이크업을 하며 결혼 시장을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 계기가 됐다. '앞으로 드레스, 부케, 사진 촬영까지 디테일한 수요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으로 이어졌다.
화려해 보이는 웨딩플래너의 일상은 감정노동의 연속이다. 그는 “수십년을 일해도 파혼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몇 달간 신랑·신부와 한 몸처럼 결혼을 준비해온 상황에서 절차가 중단되면 취소나 위약금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떠나 웨딩플래너 역시 깊이 감정이입돼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몇 달간의 노력이 아무 대가 없이 끝나는 순간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정 대표가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남녀가 한 가족으로 출발하는 순간을 완성할 때 느껴지는 에너지가 모든 소모를 상쇄하기 때문이다.
Q. ‘1세대 웨딩플래너’라는 말이 붙은 순간이 언제였나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당시 웨딩 시장 분위기도 듣고 싶습니다.
A. 1세대라는 단어가 붙은 시기는 2000년 전후였어요. 저는 1990년대 말에 웨딩플래너를 시작했고, 2000년 즈음 웨딩플래너 일을 시작한 사람들을 1세대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10년 넘게 시간이 흐른 2010년 함께했던 웨딩플래너들 대부분이 결혼이나 이직으로 이 분야를 떠나고 저만 업계에 남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 이름 앞에 '웨딩플래너 1호'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IMF였어요. 대학 졸업 후 파리 연수까지 다녀와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장품 회사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취직했었죠. 1997년 IMF 사태 때 환율이 치솟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정리해고를 당했어요. 실직 후 청담동 미용실에서 신부 메이크업을 해주는 일을 잠시 했는데, 신부들을 접하면서 ‘드레스, 사진, 부케 등 모든 밸런스를 한 번에 통찰해서 조율해주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민하던 중 미국에는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부모님께 미국에 가서 그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때는 어림없는 얘기였죠. 결국 주변의 만류에도 주먹구구식으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A. 제가 웨딩플래너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이 직업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결혼 준비 상담에 들어가기 전에 웨딩플래너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어요. 웨딩플래너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당신에게 이런 일들을 해줄 수 있습니다”라고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했죠. 현재는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을 모두가 알아서 그런 설명은 필요 없지만, 대신 “나는 다른 웨딩플래너들과 이런 점이 다르다”는 저만의 강점과 차별성을 어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업계 초창기와 현재를 비교하면 코로나19 사태의 전과 후로 트렌드가 극명하게 나뉜다고 봐요. 예전에는 결혼식 준비의 주체가 혼주, 즉 양가 부모님들이었는데 현재는 신랑·신부 본인으로 넘어왔습니다. 혼주들이 주도권을 쥐었던 시절에는 웨딩플래너가 한 쌍의 예비부부뿐만 아니라 양가 부모님들까지 총 네 분의 의견과 감정까지 챙겨드려야 했어요. 당시엔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결혼 준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서 양쪽 어머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기분까지 맞춰드리는 것이 큰 임무였습니다.
요즘은 웨딩의 주체가 부모님에서 신랑·신부로 넘어오면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대상 인원이 줄었다고 할까요? 신랑, 신부가 부모님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싶어 하거든요.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막기 위해 상견례도 결혼식 임박해서야 하는 추세입니다. 예전에는 상견례 후에 본격적으로 예식장 예약하고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면 요즘에는 예식장 예약부터 먼저 하고 결혼 준비를 진행한 다음 나중에 상견례를 하는 순서로 바뀌었어요.
또 과거에는 예비 신랑신부가 형제자매 많은 집안의 자녀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는데, 현재는 외동으로 자란 분들이 많아요. 귀하게 큰 신랑신부가 늘면서 플래너가 제공하는 서비스 스타일도 조금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웨딩플래너가 카리스마 있게 진두지휘하며 이끄는 모습이 어울렸다면 지금은 친구나 언니·누나처럼 들어주고 다독여주고 칭찬해주는 접근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한때 웨딩플래너는 로망이 있는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막상 내부에 들어와 보니 현실은 어땠나요?
A. 저는 적성만 맞는다면 로망이 있는 직업이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우선 사람 만나는 것을 정말 좋아해야 하고,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길 수 있는 성격이어야 하죠.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을 함께 준비하는 일이니 인문학적인 이해와 공감 능력도 뛰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런 성향이 강하다면 웨딩플래너가 되어 자신의 로망을 실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성향이라면 많이 피곤하고 고달플 수 있는 일이에요. 밝고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단단한 체력도 필수입니다.
웨딩플래너 일을 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날 수 있어서 견문이 넓어지고 인맥이 깊어집니다. 또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경사를 주관하는 직업이다 보니 고객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때 뿌듯함도 큰 편이죠. 항상 예쁜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찾아다니는 직업이기에 여성이 하기에도 좋은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근무 시간이 딱 정해진 건 아니지만, 대부분 고객과 약속 시간을 정해 일을 진행하기 때문에 시간 관리를 비교적 유연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결혼 후 육아나 자녀 교육과 병행하기에도 좋아서, 저는 웨딩플래너가 여성들의 평생 직업으로 손색없다고 봅니다.
다만 웨딩플래너는 서비스 업종 중에서도 가장 고차원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그릇이 큰 사람이어야 하지요. 본인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장시키려고 노력한다면, 웨딩플래너라는 로망도 결국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저 자신도 웨딩플래너가 된 것이 제 인생에 엄청난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이번 생은 직업적으로 성공했다고까지 여길 만큼 이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Q. 현재 1인 기업 형태로 일하고 계신데 팀으로 일할 때와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나요? 혼자 일하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A. 웨딩플래너는 애초에 고객에게 1대1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제가 맡은 고객은 제가 개인적으로 관리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인 회사라고 해도 업무 방식의 큰 변화는 없습니다. 다만, 여러 명의 웨딩플래너가 모인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움직일 때는 회사의 모토와 매뉴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회사 안 개별 웨딩플래너들마다 각기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마치 변호사들이 대형 로펌에 속해 일하기도 하고 1인 사무소를 운영하기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도 많게는 플래너 15명을 두고 웨딩회사의 대표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웨딩플래너들은 대부분 여성이고, 결혼이나 출산을 하면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어요. 웨딩플래닝 업계의 수익 구조는 개별 플래너들이 고객을 유치해 매출을 올리고, 그 매출을 회사와 일정 비율로 나누는 시스템입니다.
제가 고용주였던 2000년대에는 플래너들에게 기본급을 주고 추가로 매출의 30% (많게는 50%)를 성과급으로 책정했는데, 2020년대 현대에는 아예 기본급 없이 매출의 70~80%를 플래너 몫으로 주는 형태로 업계 관행이 바뀌었어요. 예전엔 명백한 고용 관계였다면, 지금은 대부분 프리랜서 관계가 된 거죠. 고용주는 임대료나 제반 비용, 세금을 다 부담하면서 오히려 매출의 70~80%를 플래너에게 주고, 플래너가 실수했을 때는 금전적 책임까지 져야 하는 구조가 됐습니다. 거기다 퇴직금까지 챙겨줘야 하니 직원 여러 명을 둔 회사의 오너로서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판단하게 되더군요. 결국 “혼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속 편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더 이상 플래너를 채용하지 않고 1인 기업 형태로 전환했습니다.
Q. 기대만큼 매출이 오르지 않을 때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원인을 어떻게 찾으시나요?
A. 혼자 일을 하면서부터는 매출보다는 고객 만족에 초점을 맞춰 일해 왔어요. 웨딩플래너가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며 매출을 올리는 직업이 아니다 보니, 매출은 결국 고객 만족이 뒤따라오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플래너가 너무 매출, 코스트, 이익만 좇아서 일하면 고객이 원하는 업체나 서비스를 맞춰드릴 수가 없어요. 수익이 많이 남는 업체만 권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그러면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 준비에 과도한 금전적 부담을 드리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소개 소개로 이어지는 고객 유입도 끊기게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매출보다는 한 커플, 한 커플 눈앞의 고객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A. 코로나 기간에 예식을 미룬 신랑신부들이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후 한꺼번에 결혼식을 올린 덕분에, 2023년 하반기부터 2024년, 2025년 상반기까지는 그 어느 때보다 웨딩 경기가 좋았어요. 제가 이 일을 27년 하면서 최고의 매출을 올린 시기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작년 하반기부터 웨딩 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고, 2026년 예약도 감소 추세예요. 웨딩플래너로 일하다 보면 웨딩업계 종사자들, 호텔 담당자 등과 정보를 많이 주고받는데, 그분들 이야기로도 2026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저는 코로나 이후 빈부 격차가 더 심화되면서 웨딩 또한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생각해요. 일단 웨딩베뉴(예식장)들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고,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패키지 가격도 거의 두세 배 가까이 뛰었어요. 결혼을 하려면 부부의 생활비를 감당할 직업과 함께 살 집, 그리고 결혼식 비용이 모두 필요한데, 취업은 안 되고 집값은 오르고 예식 비용도 만만치 않으니 결국 결혼식은 부모가 돈 많은 사람들만의 특권이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예요.
다행히 저는 오랫동안 꾸준히 해온 덕인지 코로나 때도, 지금 감소세에도 크게 타격은 받지 않았습니다. 광고나 마케팅에 의존하기보다 고객들의 소개로 신규 의뢰를 받는 편이라 아직까지는 예년과 비슷하게 일하고 있어요. 하지만 서울 시내 호텔이나 예식장 담당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황이 꽤 심각해 보입니다. 식대나 꽃 가격이 너무 올라서, 이제 와서 어디서부터 가격을 내려야 할지 모를 지경이라고들 해요. 성당, 교회, 회사강당, 공공예식장 등 가성비 좋은 예식장들은 여전히 인기인 걸 보면,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결혼 비용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Q. 결혼율이 계속 감소하면 웨딩플래너라는 직업 자체의 지속 가능성도 흔들릴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 직업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A. 결혼율 감소에다가 웨딩의 빈부격차가 더 심해지면, 웨딩플래너를 쓰는 예비부부와 쓰지 않는 예비부부로 시장이 양분될 수 있겠지요. 미국은 웨딩플래너 비용이 매우 높아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커플만 플래너를 고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웨딩플래닝 서비스가 정착되어 있어서 지금은 누구나 플래너를 쓰는 편입니다. 앞으로 상황이 많이 안 좋아지면 웨딩 자체가 부유층만 하는 이벤트가 될 수도 있고, 그에 따라 플래너도 상위 소비층만 찾는 직업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저의 원동력은 가족에게서 나오는 것 같아요. 웨딩플래너도 직업이니까,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사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가족들과 좋은 환경에서 잘 살기 위해서잖아요. 더불어 플래너로서 보람을 느끼는 건 남의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돕고 있다는 성취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객님들이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해 주실 때 정말 큰 힘이 나거든요.
요즘 세상이 워낙 인공지능(AI)으로 이야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잖아요. 모든 산업 분야에서 AI 기술이 어느 정도까지 사람 일을 대체할지가 관심사인데, 세상이 그런 식으로 변한다면 우리 업종도 언젠가 영향을 받겠지요. 하지만 아직까지 웨딩플래너는 AI가 대신하기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AI를 통해 지식이나 정보는 얻을 수 있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까지 해주진 못하니까요.
Q. 현장에서 웨딩플래너로 일하며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무엇인가요?
A. 가장 큰 스트레스는 고객의 투정, 매출 압박, 협력업체의 비협조도 아니에요. 익숙해지지 않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파혼입니다. 신랑신부와 웨딩플래너는 마치 1인 3각 경기를 하듯 한 목표를 향해 발을 맞춰 함께 달려가는데, 여러 이유로 그 끈이 툭 끊어져버릴 때가 있어요. 이유는 정말 각양각색입니다. 금전적인 문제, 남녀관계 문제, 성격 차이 등 당사자인 신랑신부가 가장 힘들겠지만, 웨딩플래너의 정신적 충격도 커요.
파국에 치달은 상황에서도, 결국 여러 가지 행정적 처리는 웨딩플래너 몫입니다. 이미 예약해둔 예식장 취소, 계약했던 업체들의 위약금 문제 등을 하나하나 정리해야 해요. 문제는 웨딩플래너가 처음 계약을 진행할 때 “만약 결혼 준비가 중단되면 이런 비용을 물어야 합니다”를 예비부부에게 일일이 자세히 설명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계약서에 아주 작은 글씨로 그 내용들을 적어두긴 하지만, 막상 파혼 상황이 발생하면 제가 다시 그 위약 조항들을 설명드려야 해요. 이미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픈 일을 겪고 있는 두 분에게 “여기까지 진행된 준비에 대한 위약금을 지불하셔야 합니다”라고 안내하는 일은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모두가 감정이 격해진 와중에 신랑신부와 양가 가족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내뱉기도 하는데, 그 불똥이 웨딩플래너에게 튈 때도 있어요. 더 현실적인 문제는 파혼이 되면 웨딩플래너의 수익도 '0'이 된다는 점입니다. 원래 웨딩플래너의 수익은 결혼식을 무사히 완성시켰을 때 발생하는데, 중간에 준비가 중단되면 몇 달 동안 열심히 뛰어다닌 대가를 한 푼도 못 받고 끝나는 거죠.
Q.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사례를 들려주세요.
A. 웨딩을 진행하면서 사실 모든 결혼식, 모든 커플에게서 감동과 보람을 느껴요. 누구에게나 결혼은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이잖아요. 각 커플마다 사연도 다르고 결혼식 진행 방식도 조금씩 다르지만, 각자 다르게 자란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가정을 이루는 출발을 함께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감동적인 일이거든요.
유난히 마음에 남는 순간들이 몇 가지 있어요. 우선, 제 도움으로 결혼하신 신랑, 신부님들이 새로운 가정을 꾸려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합니다. 특히 두세 번의 결혼을 모두 저와 함께 준비한 몇 분의 신부님들이 계세요. 첫번째 결혼에 함께 했던 웨딩플래너를 다시 찾아 재혼 준비를 같이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믿고 다시 와주셨을 때 정말 감사했고, 그런 분들이 결국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사시는 모습을 보면 더욱 뭉클해요.
또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신부님들이 계세요. 그런 신부님들이 결혼 준비를 의뢰해오시면 제가 엄마처럼 모든 과정을 함께 하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결혼식을 무사히 잘 마쳤을 때, 그분들이 제게 “정말 감사하다”며 눈물 지을 때 저도 울컥했어요. 이런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엄청난 보람을 느낍니다.
A. 맞아요. 저라고 항상 행복하진 않죠. 집에서 부부싸움을 잔뜩 하고 난 날에도 웃는 얼굴로 웨딩 진행하러 나가야 할 때가 있었어요. 아이가 아픈데 아이를 응급실에 맡겨두고 고객과 드레스 투어 약속을 지키러 간 적도 있고요. 그래도 프로니까, 일하러 나가면 신기하게도 자동으로 웃게 되고 집중해서 일하게 되더라고요.
한번은 며칠째 배가 아파서 검사를 받았는데 맹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다행히 급성은 아니라서 당장 큰일은 아니었지만, 수술 전날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금식하면서도 예정된 일정을 모두 소화했습니다. 신부님 드레스도 골라드리고 메이크업 일정 잡아드리고. 그날도 저는 내색 안 하고 웃으면서 일했죠. 그리고는 저녁이 돼서야 응급실로 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해주신 의사 선생님께 “왜 이제 왔냐”고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나요.
혼자 영화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스케줄이 비는 날에는 당일치기 여행을 훌쩍 다녀오거나 미술관에 가기도 해요.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감성을 채우다 보면 신기하게도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이렇게 고갈되었던 내 감정을 채우는 방식으로 웨딩플래너의 감정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있어요.
Q.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뭔가 결혼 비용을 싸게 해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직도 있더라고요. 사실 웨딩플래너는 웨딩 업체와 예비부부 사이에서 예약을 대행해주고 그 중간의 여러 기술적인 부분을 지원해주는 인적 서비스 제공자 역할에 가까워요. 모든 걸 싸게 만들어주는 할인업자가 아니란 말이죠. 플래너가 소개한다고 해서 그 업체의 가격을 깎아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게 아닌데, 간혹 “더 할인해달라”고 요구하실 때가 있어요. 웨딩 업체들은 플래너 개인 소유가 아닌데도 말이죠. 이게 일반에 퍼져 있는 가장 큰 오해입니다.
A. 지금 시작해도 늦은 건 없어요. 다만 어떤 일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냐가 문제겠지요. 요즘 보면 어린 웨딩플래너분들은 실력을 키우기 이전에 마케팅부터 배우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홍보도 중요하지만, 저는 본인 내면의 실력이 꽉 차야 한다고 생각해요. SNS에 보여지는 겉모습에 치중하기보다, 일단 자신의 기본기를 탄탄하게 만드는 게 먼저입니다.
Q. 앞으로 어떤 웨딩플래너가 되고 싶으신가요? 새로운 꿈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A. 저는 웨딩플래너가 제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걸 좋아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직업은 웨딩플래너가 딱이더라고요. 학창 시절 제 별명이 홍익인간이었어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인데, 그런 정신으로 마지막 한 커플까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웨딩플래너로 남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웨딩플래너 일을 그만두게 되면, 그동안의 경험을 모아서 집필 활동을 하고 싶어요. 제가 현장에서 겪은 경험들을 생생히 기록하는 책을 한 권 쓰는 것. 그게 요즘 새롭게 생긴 꿈입니다.
Q. 취업 준비 등으로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A. 저는 IMF 시절에 사회에 나왔어요. 잘나가던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다 짤리고 웨딩 업계에 들어왔는데,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첫 월급이 80만원이었어요. 하루 종일 신랑 예복 와이셔츠를 수십 장씩 다리는 게 일이 다였죠.
그때도 좌절하지는 않았어요. 언젠가는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스스로를 믿었거든요. 내가 다린 셔츠를 입고 결혼식에 서 있을 신랑들을 떠올리면서 하루하루 버텼어요. 그렇게 시간이 쌓이더니, 지금은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은 다 작아요. 사회에 나와서 맡은 일이 아무리 작아 보여도 성실하게 하다 보면 기회는 꼭 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 결국 기회는 오더라고요.
#직업불만족(族) 편집자주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했지만 매일 퇴사를 고민하는 30대 청년,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제2의 삶을 개척한 40대 가장,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70대 청소 노동자까지. ‘직업불만족(族)’은 직업의 겉모습보다 그 안에 담긴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당신의 평범한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깊은 위로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일하며 살아가는 세상 속 모든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하단 구독 버튼을 눌러주시면 직접 보고 들은 현직자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