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 서거 100주년
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①
- 신을 사랑하듯 건축을 사랑하다
144년째 공사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언제 누가 짓기 시작한 걸까?
성당 건축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신부도 건축가도 갑부도 아니었다. 주셉 마리아 보카벨라 이 베르다구에르라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는 종교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민족을 사랑했던 그는 바르셀로나의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하느님보다 돈을 좋아하고 나누기보다 움켜쥐기를 즐겨 하며 공동체의 안녕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 추구하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사회에 대한 불신과 혼란이 팽배해지면서 사람들은 성당을 찾지 않고 성직자들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성당과 수도원에 불을 지르고 신부와 수녀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냉담자를 넘어 반기독교주의자들이 된 것이다.
성당 건축의 초석을 놓은 보카벨라의 초상화.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던 그는 카탈루냐인들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는 참된 신앙의 공간을 건설하고자 했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872년 로마 여행을 떠난 보카벨라는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신앙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로마인들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로레토에 있는 산타 카사 성당에 들렀다. ‘산타 카사’란 성스러운 집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산 나자렛 마을에 있던 산타 카사는 성모 마리아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은 장소였다. 전승에 따르면 이 집은 1291년 십자군 원정이 끝나갈 무렵 나자렛에서 로레토로 옮겨졌다. 천사가 나타나 통째로 옮겼다고도 하고 철수하던 병사들이 해체해 배에 실어 옮겨갔다고도 한다. 보카벨라는 산타 카사 위에 세워진 평화롭고 아름다운 성당을 보고 벅찬 감격을 느꼈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민들도 인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버리고 사랑과 평화가 넘쳐나는 성가정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아울러 카탈루냐인들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는 참된 신앙의 공간, 즉 ‘속죄의 성가정 성전’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만들었던 공동체인 성 요셉 신도 영성 협회를 통해 십시일반으로 기부금을 모아 에이샴플레에 있는 12,800㎡의 토지를 매입한 뒤 유명 건축가인 비야르에게 성당 건축을 의뢰했다. 보카벨라의 순수한 취지에 공감한 비야르는 비용을 받지 않기로 하고 기꺼이 설계와 건축 책임을 맡아주었다. 그는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서 가우디를 가르친 교수였다. 학생 시절 가우디는 비야르의 작업실에서 제도공으로 일하며 그를 도와 몬세라트 수도원에 있는 소성당 건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침내 1882년 3월 19일, 성 요셉 축일에 엄숙한 의식을 치른 뒤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성당 후진에 있는 지하 봉안당부터 개시되었는데, 이는 공사 감독 비야르의 네오고딕 양식 설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비야르와 보카벨라의 건축 고문인 조안 마르토렐 이 몬텔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지하 봉안당 대들보에 어떤 재료를 쓸 것인가로 이견을 보였다. 별것 아닌 듯 보였으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1년 만에 비야르는 공사 감독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보카벨라는 난감했다. 그는 마르토렐에게 이 일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마르토렐은 손사래를 치며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건축학교 제자였던 가우디였다. 가우디가 졸업 심사에서 탈락했을 때 로젠 교장을 설득해 다른 주제로 도면을 제출할 기회를 줌으로써 졸업 심사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수가 바로 마르토렐이었다. 그가 봤을 때 실력이나 열정이나 신앙을 두루 갖춘 가우디야말로 이 일에 적임자였다.
1883년 11월 3일,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공사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건축사 자격증을 딴 뒤 레이알 광장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나서 마타로 노동자 단지와 카사 비센스 건축에 매달리고 있던 가우디는 서른한 살의 젊은 건축가였다. 어느 날 불쑥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을 위해 태어난 건축가였다. 그는 이제껏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신과 인간, 자연이 하나가 된 건축을 구상했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성당이기도 했다.
가난한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
삼십 대 초반에 일을 시작한 가우디는 칠십 대 중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아낌없이 바쳤다. 43년은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정도로 긴 시간이다. 그 세월 동안 가우디의 신앙과 영성은 더욱 충만해졌고 건축 기법과 기술은 진보를 거듭했으며 성경과 전례에 관한 지식은 사제나 학자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이와 같은 가우디의 농익은 내공이 구석구석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오로지 신도들의 기부금만으로 건축비를 충당했기에 돈이 모여지면 공사를 진행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공사를 중단해야 했다. 공사가 어떻게 진척될지 아무도 몰랐다. 계획은 가우디의 머릿속에 있었고 시간은 신의 셈법에 따라서 헤아려졌다.
지지부진한 성당 건축과 달리 매우 빠르게 지어진 집이 있다. 그것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매진하는 노동자들과 인근에 사는 취약 계층의 자녀들을 무상으로 교육하기 위한 부속학교였다. 비극의 주간 사건이 광풍처럼 바르셀로나를 휩쓸고 지나간 1909년 가을 무렵,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 봉안당의 첫 주임 신부인 길 파레스 이 빌라사우는 가우디에게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가우디 역시 성당 건축을 위해 애쓰는 많은 노동자의 자녀들이 공사장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좋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는 걸 보며 마음 아파하던 차였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즉각 일을 추진했다. 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금도 항상 부족한 형편이었기에 공사 비용은 가우디의 사재에서 충당해야 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저예산 건축이었지만, 가우디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학교 건물을 지었다.
수많은 상징으로 가득한 성당 외부는 세 개의 파사드와 열두 개의 종탑 그리고 여섯 개의 채광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사드(Façade)는 건물의 출입구가 있는 정면 외벽 부분을 가리킨다. 건물의 디자인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가장 먼저 사람들의 시야를 사로잡는다. 세 개의 파사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순간, 즉 탄생, 수난, 영광을 나타낸다. 한 개의 파사드에 네 개의 종탑씩 총 열두 개의 종탑이 세워지는데, 이는 열두 제자를 의미한다. 성당 외부 한가운데 제일 높이 세워지는 채광 탑은 그리스도의 탑으로 이 위에 올라가는 십자가는 예수의 승리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탑 주변에는 네 명의 복음사가, 즉 신약성경 맨 앞에 나오는 복음서를 집필한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탑이 둘러싸고, 후진에는 그리스도의 탑 다음으로 높고 화려한 성모 마리아의 탑이 자리한다.
탄생의 파사드 출입구는 세 곳이다. 중앙은 예수에게 바치는 사랑의 문이다. 양쪽 문은 담쟁이넝쿨과 나뭇잎들로 꾸며져 있다. 자세히 보면 사마귀, 메뚜기, 나비 같은 곤충도 숨어 있다. 그 사이의 종려나무 기둥에는 예수의 족보를 기록한 두루마리가 둘둘 말려 있다. 예수부터 아브라함까지 이름이 적힌 기둥 맨 밑에는 선악과를 물고 있는 뱀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씻기는 마리아를 요셉이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양쪽에 소와 나귀의 머리가 선명하다. 이는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라는 이사야서 1장 3절을 반영한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 조각 아래에는 예수에게 경배하는 동방박사들과 천사에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목자들이 보이고, 위쪽에는 각종 악기와 노래로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들이 등장한다. 주변에는 아몬드 나뭇잎과 꽃들이 장식되어 있다. 겨울을 이겨내고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아몬드 나무는 사랑과 희망과 새로운 출발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