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이 런던 사우스 켄싱턴에 위치한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Victoria&Albert Museum)의 조각 전시실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하나의 새로운 ‘예술적 문제’를 마주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석고로 만들어진 <다비드> 사타구니에 달린 한 쌍의 거대한 고환과 그사이에 축 늘어진 음경이었습니다.
그 해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으로 배송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운송된 원본 크기의 석고 복제품이었습니다. 위풍당당한 영웅의 자세로 선 <다비드>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고전적 누드로 조각되어 있었고, 중심부에 놓인 남성 생식기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너무도 인간적인 해부학'은 금욕과 절제를 중시하는 여왕의 눈에는, 나아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관념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습니다. 고전적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정숙함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해결책은 놀랍도록 단순했습니다. <다비드>의 성기를 가릴 수 있도록 고리로 걸 수 있는 탈착식 <무화과나무 잎사귀> 조각이 제작된 것입니다. 왕실 방문 시에는 이 인공 잎사귀가 조심스럽게 작품 위에 덧씌워졌습니다.
클레멘테 파피, <다비드> 석고 복제품, 1856년. / 사진 출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도메니코 부르치아니 & 유한회사, <다비드>를 위한 <무화과나무 잎사귀>, 1857년경. / 사진 출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다비드>의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특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회화나 조각으로 묘사된 나체의 일부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사용했습니다. 중세 유럽부터 과거의 작품이 시대의 도덕과 미의식이 충돌할 때마다 과하게 노출된 조각상에 잎사귀를 붙이거나, 신체가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된 그림에 이러한 잎사귀를 적절하게 그려 넣었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거장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육체를 찬미하고자 <다비드>를 벌거벗겨 조각했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러한 찬미를 적절히 감추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존경이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의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고전미에 대한 존중과 성적 사실성에 대한 불편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시대의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마사초, <낙원추방>, 1425년1680년에 잎으로 중요부위를 가렸으며, 198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 사진 출처. 브란카치 예배당
사진으로 촬영된 <빅토리아 & 알버트 조각전시실에 비치된 다비드>, 1860년경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가려진 <다비드>가 보인다. / 사진 출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단지 서막에 불과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라는 어색한 장치는 빅토리아 시대 사회와 더불어, 어쩌면 지금 이 현대 사회에서도 남아있는 벌거벗은 신체와 쾌락, 그리고 직설적인 이미지의 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비드>가 런던에 도착한 그해,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새로운 법률 하나가, 이후 100년이 넘도록 영국의 예술과 문학, 그리고 검열의 흐름을 결정짓게 된 것입니다.
외설, 법적으로 규정되다
1857년 제정된 「외설 출판물법(Obscene Publications Act)」은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설적인 자료의 판매 및 유통을 형사 처벌 대상으로 명시한 법률이었습니다. 이 법은 국가에 특정 인쇄물을 압수하고 폐기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법 어디에도 '외설(obscenity)'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모호함은 도덕주의자들과 판사들에게 엄청난 재량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예술이 출판될 수 있는지, 전시될 수 있는지, 혹은 심지어 우편으로 발송될 수 있는지를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 법의 원래 표적은 음란물과 저속한 소설이었지만, 곧 그 영향력은 싸구려 잡지를 넘어 훨씬 더 방대한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고전적 누드를 담은 미술 서적은 물론, 성교육 안내서, 해부학 삽화 등도 모두 압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법안이 제정된 배경에는 대중 인쇄물의 급격한 생산과 확산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저렴한 가격에 책과 팸플릿, 판화들이 활발히 유통되기 시작했는데요, 하층민과 중산층이 처음으로 삽화가 포함된 인쇄물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지배 계층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직설적으로 표현된 성적인 내용을 접하게 되면 '도덕적으로 취약하다'고 여겨졌던 여성, 하인, 어린이들이 쉽게 타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H. 린튼, <작업자들이 관리하고 있는 기계화된 샤프트 구동 인쇄기>, 1859년 프랑스 파리의 한 인쇄소의 모습을 묘사하는 목판화. 출판의 대량생산은 정보의 접근성을 폭발적으로 낮췄다. / 사진 출처. 웰컴 컬렉션
이러한 흐름은 영어권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유사한 법 제정을 이끌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873년, 강경한 도덕주의자였던 앤서니 컴스톡(Anthony Comstock, 1844~1915)의 이름을 딴 악명 높은 「컴스톡법(Comstock Laws)」이 제정됩니다. 이 법은 '외설적이고, 음란하며, 방탕한' 자료의 우편 발송을 전면 금지했는데요. 그 기준이 매우 불분명하고 폭넓어서 성인 문학뿐만 아니라 피임 안내서, 해부학 서적, 성적 자유를 암시하는 글까지 모두 검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컴스톡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정원사(weeder in God's garden)’라고 불렀고, 자신의 손으로 폐기한 책이 15톤, 그림은 400만 장에 이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도덕을 빌미로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표적은 단순히 성인물 판매자를 넘어, 여성의 인권과 피임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 같은 이들에게 확대됐습니다. 컴스톡의 공격으로 생어는 수차례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법률들은 나체 자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한때 아름다움, 지혜, 신성과 연결되었던 벌거벗은 몸은 이제 법적 검열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판단 기준은 애매모호하기만 했습니다. 무엇이 '고상한 나체'이고 무엇이 '외설'인지는 그 의미가 불분명한 '품위'와 '순결'이라는 이름 아래, 흔들리는 잣대에 맡겨져 버린 셈이죠.
<앤서니 컴스톡>, 1913년. / 사진 출처. Anthony Comstock: Fighter 도서에서 발췌외설의 모호함, 그리고 ‘히클린 테스트’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검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 외설인가?’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모호함을 메우기 위해 영국 법원이 내세운 기준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여겨지는 「여왕 대 히클린 사건(Regina v. Hicklin, 1868)」 판례입니다. 이 영국 재판에서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알렉산더 제임스 에드먼드 콕번 경(Sir Alexander James Edmund Cockburn, 1802~1880)은 외설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작품 전체를 보았을 때, 타락하거나 부도덕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패시킬 우려가 있다면, 그 내용은 외설이다.”
너무나도 추상적이지 않나요? 이 정의는 곧 「히클린 테스트(Hicklin Test)」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이 기준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나 창작자의 의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작품의 일부라도 '도덕적으로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독자, 이를테면 어린이, 하인, 여성 등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전체가 외설로 간주되었죠. 이 판례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서구권의 외설 재판에서 핵심 기준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누드 조각은 고전미와 전통을 이어받은 예술 작품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지만, 같은 이미지가 책이나 엽서 속에 담겨 유통될 경우에는 압수되거나 폐기될 수 있었습니다. 외설의 기준은 누가, 어떤 맥락에서 그것을 접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졌습니다. 상류층 수집가는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었던 이미지가, 노동자 계층의 손에 들어가면 돌연 위험한 것이 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린 거였죠.
선정적이고 반정부 성향의 급진주의 잡지 <더 매시스>, 결국 폐간되다
영국의 「외설 출판물법」이나 미국의 「컴스톡법」은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이는 부유한 수집가보다는, 대중에게 이미지를 공개하려 했던 출판업자, 서점 주인, 예술가들에게 훨씬 더 가혹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예술가 중 법적 검열 대상이 된 이들은 신화나 성경 이야기를 삽화로 그린 화가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그린 등장인물들의 포즈가 너무 노골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왼쪽부터] 모리스 베커, <더 매시스 5권 12호 표지>(1914년)과 휴고 겔러트, <더 매시스 9권 4호 표지>(1917). / 이미지 출처. 모더니스트 저널 프로젝트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20세기 초에 발행되었던 진보주의 잡지 <더 매시스(The Masses)>가 급진적인 논평과 난잡한 삽화를 실었다는 이유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성 해방을 지지하거나 성 역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 예술들, 페미니스트 이미지나 퀴어적(동성애적) 표현들은 출판 자체가 위험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이 잡지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의 참전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징병제와 전쟁 선전을 풍자하는 삽화를 게재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반전주의적 목소리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고, 이에 따라 1917년에 제정된 「간첩법(Espionage Act)」을 적용해 <더 매시스>의 발행을 사실상 금지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소송이 바로 「매시스 대 패튼 사건(Masses Publishing Co. v. Patten, 1917)」입니다. 이 사건의 판결을 담당했던 뉴욕 남부지방법원의 런드 핸드 판사(Learned Hand, 1872~1961)는 정부가 잡지를 압수하려는 시도를 기각하면서 한 가지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후일 「선동 테스트(Incitement Test)」로 불리게 되는데요, 핸드 판사는 표현물이 실제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불법 행위를 선동(direct incitement)’하지 않는 이상, 단순히 정부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만으로 검열할 수 없다고 명확히 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일보한 판단이었는데요, 왜곡되고 모호했던 「히클린 테스트」와 달리, 말의 맥락과 의도를 중심으로 표현의 자유를 판단해야 한다는 새로운 기준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혀 <더 매시스>는 결국 강제로 폐간하게 됩니다.
이처럼 <더 매시스>의 사례는 외설·도덕의 문제와 더불어, 국가권력과 표현의 자유가 충돌할 때 무엇이 진짜 ‘위험한 표현’인지에 관한 미국 법제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검열 이제는 창작·콘텐츠 플랫폼까지 이어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외설 규제와 표현 검열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이상한 일들’로 치부하기 어려운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히클린 테스트」가 만들어낸 모호한 기준, 「컴스톡법」의 광범위한 금지 조항, 그리고 <더 매시스>의 최후를 보면 정치·도덕·안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개입은 결국 어떤 이미지와 말이 ‘허용되는가’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판단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과도하게 노출된 신체’를 이유로 예술 이미지를 삭제하고, 특정 정치적 발언이 지역·국가별 규제에 따라 차단되며, 창작자들은 작품의 맥락과 의도가 충분히 설명되기 전에 차단·삭제당하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19세기의 판사들이 ‘도덕적으로 취약한 대중’을 상정하며 검열을 정당화했던 것처럼, 현대의 기술 시스템 또한 사용자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이미지와 텍스트를 걸러내고 있습니다.
SNS 플랫폼 인스타그램 검열 예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콘텐츠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검열 및 제거된다. /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스크린 캡처
결국 외설과 검열을 둘러싼 이 역사적 사례들은 모두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누가 무엇을 위험하다고 판단하는가?”
그리고 그 판단은 여전히 예술가, 작가, 출판인, 나아가 디지털 플랫폼에서 작업하는 모든 창작자의 자유와 표현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 하나, 문장 하나에는 시대의 기준이 스며 있으며, 그 기준은 언제든 다시 재편될 수 있습니다. 외설과 검열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곧, 표현의 자유라는 경계가 어떻게 그려지고 지워져 왔는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