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국립 피카소 미술관에서 2026년 3월 1일까지 열리는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 회고전은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한눈에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그의 초기 드로잉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시대적 맥락과 작가의 내적 여정을 함께 조명하며 관람객에게 풍자와 비극, 그리고 회화적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1937년, 거스턴은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게르니카>를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 감정을 바탕으로 그는 <폭격>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은 당시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 <프랑코의 꿈과 거짓>과 함께 전시되었다. 전시는 스페인 국민을 지지하고,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뜻으로 뉴욕에서 열렸다.
이후 거스턴은 피카소의 풍자적이면서도 기괴한 화풍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그와 예술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피카소는 그에게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1937), National Museum Sofía Queen's Art Centre, Madrid 소장 사회적 참여
필립 거스턴은 로스앤젤레스 미술학교 재학 시절, 교직원을 풍자한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는 이후 사회적 폭력과 부조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KKK(Ku Klux Klan, 쿠 클럭스 클랜) 구성원들의 만행을 다룬 그의 초기 작품은 전시 도중 두건을 쓴 이들이 난입해 작품을 파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거스턴은 부당하게 강간 혐의로 기소된 아홉 명의 흑인 청년들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 사법적 린치를 고발하는 작품도 남겼다.
또한 멕시코 정부의 의뢰로 제작된 대형 벽화 <테러리즘과의 투쟁>은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점차 고조되던 파시즘의 기세를 경고하는 대작이었다. 그 후, 미국 정부가 경제 대공황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연방 미술 프로젝트라는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자, 거스턴은 이를 통해 정부의 사회 정책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벽화 작업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거스턴의 그림은 표현 방식이나 화풍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항상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는 특징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필립 로스(Philip Roth)의 소설 <우리 패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드로잉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는 닉슨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를 소재로 한 풍자적이고 캐리커처적인 표현이 그의 회화 작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거스턴의 80점이 넘는 드로잉 작품들은 1937년 피카소가 그린 <프랑코의 꿈과 거짓>의 구성, 1930년대 잡지와 신문에 실린 신랄하면서도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정치 풍자 드로잉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파블로 피카소 <프랑코의 꿈과 거짓>(1937),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소장
닉슨 드로잉 시리즈부터 거스턴의 마지막 회화에 이르기까지 피카소 미술관 전시는, 거스턴이 드로잉의 그로테스크하고 캐리커처적인 재치와 회화의 강렬한 표현력을 어떻게 절묘하게 이어왔는지를 조명한다. 그림에서 쏟아지는 힘과 블랙 유머가 그의 작품에 신랄한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미국 중서부의 대학에서 수년간 강의를 마친 필립 거스턴은 1947년 뉴욕으로 돌아와, 첫 드리핑(Dripping) 작품을 시작한 잭슨 폴록과 다시 연락을 이어가며 뉴욕 화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된다. 또한 거스턴은 일본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며 일본의 서예뿐 아니라 몬드리안의 격자 구조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거스턴의 작품은 1958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전시 <뉴 아메리칸 페인팅(The New American Painting)>에 소개되며 미국식 추상표현주의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어 1962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거스턴 회고전은 그가 뉴욕 화파에서 차지하는 뛰어난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