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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서진 것들과 함께 사는 법, 영화 '미러 넘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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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옥미나의 아트하우스 칼럼

    2025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 <미러 넘버 3>

    운디네(물), 어파이어(불)에 이어
    '미러 너버 3'의 원소는 '바람'

    인간의 상실에 대하여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또 하나의 3부작이 완성되었다. 이전 작품인 <내가 속한 나라>(2000), <고스트>(2005), <옐라>(2007)가 ‘유령 3부작’, <바바라>(2012), <피닉스>(2014), <트랜짓>(2018)은 ‘역사 3부작’으로 분류되었다.

    이번에는 <운디네>(2020), <어파이어>(2023), <미러 넘버 3>(2025)으로 구성된 ‘원소 3부작’이다. 이쯤 되면 합리적인 의심이 들 차례다. 게으르고 안일한 평단의 결탁일까, 무능하지만 집요한 마케팅 전략일까. 하지만 이 분류법의 진짜 출처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본인이다.

    ‘영화 1편 연출이 건물 건축이라면, 3편을 만드는 건 도로를 놓고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라는 것이 감독의 설명이다.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상상하는 그의 기본 창작 단위가 3부작인 모양이다. 마침 원소 3부작이 모두 상영 중이다.

    많이 볼수록 많이 알게 되고, 많이 알수록 많이 보이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세계로 떠나보자.

    ‘원소 3부작’인 <운디네>(물의 정령), <어파이어>까지는 직관적인 제목이었다면, <미러 넘버 3>는 원소의 정체를 가늠하기 위한 상상력이 조금 더 필요하다.

    ▶▶[관련 칼럼] 주연은 바람, 조연은 여백…독일 영화의 정수가 완성됐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영화 제목인 <미러 넘버 3>는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곡 거울(Miroirs)의 세 번째 곡, ‘바다 위의 조각배’를 의미한다. (그가 일찍이 ‘밤의 가스카르’ 모음곡으로 ‘운디네’를 작곡한 것이 우연일 리 없다) 바다 위 조각배의 운명은 온전히 바람에 달렸듯, 바람은 찰나지만 변화의 계기가 된다. 그리고 변화는 익숙했던 풍경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미러 넘버 3>는 익숙했던 원래의 세계가 전복된 다음, 남겨진 인물들의 시간과 행방을 정교하게 헤아리는 ‘바람’에 대한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라우라(파울라 베어)는 다리 위와 강둑에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운디네>의 파울라 베어를 겹쳐 놓는다면 훨씬 더 흥미롭게 해석될 도입부다. 물의 정령이 이제 땅에 올라와 강물을 굽어보고 있는 셈이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라우라는 내키지 않는 여행길에서 (<옐라>와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를 당하고, 기적처럼 사고와 죽음에서 튕겨져 나온 것같이 멀쩡하게 생명을 건진다. 그리고 마침 현장을 발견한 베티(바르바라 아우어)의 집에 며칠 의탁하게 된다. (바르바라 아우어는 <내가 속한 나라>에 이어 다시 어머니로 나온다.)

    친절하고 다정한 베티는 문밖에 서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대면하는 것은 옷자락을 나부끼게 만드는 새벽 바람이 전부다. 반면 베티의 집은 시간의 흐름이 멈춘 정물의 공간이다. 고장 난 물건들과 함께 스스로를 오래 방치했을 베티는 라우라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일상의 불편과 곤란을 새삼스럽게 인지한다.

    허투루 뇌까리는 라우라의 고백에 “그건 네 탓이 아니다!”라고 반사적으로 외치는 베티의 외침은 지나치게 다급하다. 또 ‘우리집 남자들’은 식탁 위에 놓인 여벌의 식기를 발견하고 탄식했다가 이내 주방의 소음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얼어붙는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어머니를 사로잡았던 망령이 육신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마주 앉아 음식을 권하는 것일까. 그녀를 세심하게 헤아리는 가족의 호의와 친절, 애틋한 눈빛과 깊은 한숨에서는 다른 층위의 감정이 감지된다. 라우라는 이 가족에게 누군가를 대체하는 존재 혹은 잠시 방문한 유령인 것만 같다.

    원래 시나리오는 강가에서 시작하는 대신, 라우라의 학교 생활을 담았다.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 라우라의 곤란’을 자기소개로 삼았던 셈이다. 영화의 결말도 달라졌다. 먼저 촬영한 엔딩은 포치에서 달걀을 먹는 베티의 가족 앞에 여행 가방을 든 라우라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속의 문장은 ‘라우라가 (가족의 삶에) 침입한다(intrude into)’였다. 단어 본연의 아우라로 그녀의 행동을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촬영을 하고 나니 ‘라우라의 귀환으로 원래 가족 형태를 회복’하는 엔딩 씬만 덩그러니 남았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이 장면을 글과 영화의 차이로 설명한다.

    “작가는 24시간 내내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영화는 거짓말을 시작하는 순간 즉시 알아차린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우리가 목격한 모호한 미소로 대치되었지만 <미러 넘버 3>에 훨씬 더 어울리는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미러 넘버 3>은 트라우마를 품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늘 그렇듯) 인생에 기적 같은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그들은 딸의 자리에 라우라를 대입해서 마음껏 보듬고 아끼며 가족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향수에 젖는다. 위로와 치유는 상호적이라서 휴식과 배려를 경험한 라우라도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된다. 가족은 이제 다시 마주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영화 <미러 넘버 3> 스틸컷 /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삶을 제대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 계속 배우고 터득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상처와 상실을 경험한 다음에도, 같은 공간에서 내내 부재를 감각하면서 그래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법. 고통과 타협하며 사이좋게 살아가는 법. 부서지고 망가진 것들을 다시 돌보고 고치는 법. 그리하여 마침내 삶과 죽음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는 법.

    옥미나 영화평론가

    [영화 <미러 넘버 3> 30초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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