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 컷 / 출처. IMDb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 컷 / 출처. IMDb
세상에나 마상에나! 불평과 불만이 가족을 넘어, 친지를 넘어, 이웃을 넘어, 커뮤니티 곳곳을 찌르다 못해 자신까지 옥죈다. 팬지(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예쁜 꽃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과 다르게 말 한마디만 섞으면 꽃이고 뭐고 가지를 툭 부러뜨려 멀리 던져버리고픈 인물이다. 처먹었으면 설거지하라고, 뭐 좋은 일이 있다고 허구한 날 웃고 지랄이야, 타조같이 생겨 먹어가지고, 니 놈은 정자가 머릿속에 있어서 아기 만들 일은 없을 거다 등등 직접적인 욕은 안 해도 상대의 기분을 잡쳐놓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일상 속 ‘빌런’(?)이라서다.

어디서 슈퍼히어로가 날아와 팬지를 추방해 그녀 주변에 평화를 가져왔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한국 개봉 제목은 <내 말 좀 들어줘>라고 극한 시험에 들게 하는 뉘앙스로 팬지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도록 호소한다. 원제는 ‘감당하기 힘든 진실들 Hard truths’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용암 분출하듯 무섭게 뿜어대는 팬지의 험한 말의 행간에서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헤아려 보자는 의도다. 감독은 영국 출신의 마이크 리다. 한국에는 <세상의 모든 계절>(2010), <해피 고 럭키>(2008)가 정식 개봉했고, <비밀과 거짓말>(1996)과 <베라 드레이크>(2004)가 각각 칸과 베니스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마이크 리 감독은 깨진 도자기처럼 파편화된 인물의 관계와 관련한 삶에 주목한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감독 본인이 각본을 쓰면서도 극 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출구 없는 미로의 마음속을 넓게 조망하는 방식으로 바라보는 게 특징이다. 주인공에 포커스를 맞추는 듯하면서 주변의 인물과 관계까지 샅샅이 훑고 살펴봄으로써 커뮤니티 안에서 발생한 문제가 누구 하나에만 있지 않다는 걸 밝혀 사건의 근원까지 파고들려 한다. <내 말 좀 들어줘>는 팬지의 사연에만 한정하지 않을뿐더러 팬지를 관계 파탄의 원흉으로 몰고 가려는 것도 아니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 컷 / 출처. IMDb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 컷 / 출처. IMDb
팬지는 자매다. 동생이 있다. 팬지와는 성격이 영 딴판이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샨텔(미셸 오스틴)은 손님 머리를 해주면서 티키타카로 대화를 이끌어 향기 좋은 비누로 손을 씻듯이 분위기를 매끄럽고 가져가고, 슬하의 두 딸과는 허파에 바람이 들 다 못해 펑크가 난 것처럼 웃음이 끊이질 않아 엄마인지, 친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샨텔이 이렇게 구김살 없이 자란 데에는 언니 팬지의 보살핌이 컸다. 아빠는 없어, 엄마는 일하느라 바빠, 팬지가 대신 부모 역할을 하면서 샨텔을 사랑받는 엄마로, 호감 가는 미용실 주인으로, 환영받는 이웃으로 만들었다.

언니를 향한 사랑이 누구보다 큰, 유일하게 팬지를 피하지 않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대화를 이어가는 샨텔은 이제 역할을 바꾸려 한다. 자신을 돌보느라 스트레스가 커서 그 불안감이 만성이 되어 신경질적으로 된 팬지를 곁에 두고 마음속에 못으로 박힌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니 인생이나 신경 써, 내가 뭘 하든 신경 꺼, 팬지는 면전에서 불을 뿜지만, 샨텔의 노력이 가상한 걸 아는지 조금씩 변하려 노력한다. 꽃병 없는 꽃처럼 자리를 못 잡던 팬지는 이제 꽃병에 물까지 채워 자기 이름답게 꽃 같은 인생을 살아보려 어렵게 마음을 다잡는다. ‘내 말 좀 들어줘’ 동생에게 그간 쌓였던 감정을 먼지 털 듯 털어놓은 탓이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 컷 / 출처. IMDb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 컷 / 출처. IMDb
그래서 팬지는 불평과 불만의 입질을 그만두고 주변과의 화해에 성공하는가. 팬지의 생일을 맞아 그동안 겁먹은 강아지마냥 엄마 앞에서 꼬리 내린 표정으로 일관하던 아들은 용기를 쥐어짜 쭈뼛쭈뼛 꽃 선물을 건넨다. 평소 같았으면 꽃 살 돈으로 저축이나 해라 이놈아! 꽃 살 시간에 자기 계발이나 해 이 자식아! 목소리를 높였을 팬지는 웬일인지 물병을 꺼내 꽃을 담고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무미건조했던 집 안이 일순 밝아지는가 싶더니만 이를 지켜보던 남편이 난 팬지 사연 같은 거 모르겠고, 그 꽃을 뽑아 들고는 마당에 쓰레기 버리듯 던져 버린다.

그동안 아내에게 받았던 핍박과 서러움과 안 좋았던 기타 등등의 감정을 생각하면 꽃이고 뭐고 온전하게 봐줄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딱히 해결책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함께 있으면 짜증 나고, 혼자 있으면 또 생각나 의지하게 되고, 이런 게 가족인가, 관계인가. 그래서 <내 말 좀 들어줘>의 원제는 복수형의 감당하기 힘든 진실‘들’인 거다. 인간은 혼자서는 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어느 한 명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어,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우리의 진실들을 담고 있는 셈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메인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