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2025년의 한국 뮤지컬은 ‘도약과 변화의 해’라고 정리될 듯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어워즈 6개 부문 수상으로 <위대한 개츠비>에 이어 영미권에 ‘한국(Korean) 뮤지컬’의 위상을 알린 것뿐만 아니라, 한중일을 포함한 동남아시아까지 원소스로서의 ‘K-뮤지컬/K-컬처’가 지경을 넓히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 콘텐츠 <미생>과 <이태원 클라쓰>가 초연돼 한국(계) 창작진들의 글로벌 프로젝트 수행이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문화공작소 상상마루는 2025년 7월 베트남에 뮤지컬 <캣 조르바>를 공식적인 첫 상업 라이선스 작품으로 계약을 체결해 베트남 청소년극장(Nhà hát Tuổi trẻ Việt Nam)과의 공동 제작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다.

이러한 외적인 확장 외에 한국의 로컬 시장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한국 뮤지컬이 ‘여성’을 키워드로 주제적, 산업적 측면에서 일으킨 변화가 그것이다. 2018년 #미투 운동을 전후로 여성 서사 뮤지컬은 여성들끼리의 ‘치유와 연대’를 여성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만들어왔다. 이와 더불어 여성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고, 남성/어른의 폭력 아래 짓눌린 진짜 자기의 얼굴을 직시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작품이 주요한 흐름을 이끌었다.

최근엔 남성 배우들이 했던 역할을 여성이 맡는 크로스 젠더 액팅이나 남성의 영역까지 경계를 확장한 여성 배우들의 ‘수행성’이 강조되는 캐릭터가 많아지고 있다. <베르사유의 장미>(2024)의 오스칼, <하데스타운> (재연, 2024)의 배우 최정원이 구현한 헤르메스, <올랜도 in 버지니아>(2025)의 상징적 인물 올랜도, 그리고 <하트셉수트>(2025)의 아문까지 이중적이고 모호한 젠더를 수행하는 캐릭터들이 눈에 띈다. 이는 공연에서 여성의 신체가 수행하는 돌출적 지점과 유니크한 매력을 동시에 부각시키며 캐릭터에 대한 기존 해석을 넘어서는 입체성을 구현하고 있다.

연출가, 카리스마, 여성의 얼굴

현재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브로드웨이 42번가>(제작 CJ ENM, ㈜샘컴퍼니, 롯데컬처웍스 주식회사)에서도 같은 시도가 보인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삼성영상사업단에 의해 1996년 공식 라이선싱 초연된 이후 올해 16연에 접어든 한국의 대표적인 라이선스 뮤지컬로서,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줄리안 마쉬에 박건형, 양준모, 그리고 ‘박칼린’을 캐스팅하여 기존과 다른 해석을 더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80년에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공연이 시작되어 1989년까지 총 3,486회 공연된 ‘백스테이지 뮤지컬’의 원형과 같은 작품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연출가 줄리안 마쉬가 브로드웨이 쇼 ‘프리티 레이디’를 성공시키는 이야기를 담는다. 공연은 ‘극 안의 극’과 ‘극 밖의 극’으로 나뉘어 ‘극 안의 극’에서는 필라델피아 공연 이후 뉴욕으로 진출하는 ‘프리티 레이디’의 장면들이 탭 댄스의 향연과 함께 펼쳐지며 ‘극 밖의 극’에서는 한 편의 브로드웨이 쇼가 제작되는 전체 과정을 따라간다. 이 메타적인 작품은 그야말로 브로드웨이의 자화상이라고 할 만하다. 1980년 브로드웨이 초연 포스터 카피인 “천상의 뮤지컬(A Musical Made in Heaven)”은 이러한 공연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담아냈다.

연출가 줄리안 마쉬는 <브로드웨이 42번가>의 구심점이다. 탭을 추고 노래를 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는 2막 ‘브로드웨이 자장가(Lullaby of Broadway)’와 ‘42번가(리프라이즈)’ 두 곡을 노래할 뿐이지만, 전체 플롯을 진행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 ‘프리티 레이디’라는 새로운 쇼를 연출하게 된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시대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쇼를 성공시켜 브로드웨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공고히 다지려 했던 그의 야망이 대공황 시대 공연계 전체의 생존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배우 오디션, 장면 연습, 제작과 투자 상황, 배우 사생활 문제 등 공연의 전반적인 준비 과정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돌파한 그는 결국 ‘프리티 레이디’를 브로드웨이 42번가 극장에서 성공적으로 올린다. 이 과정에서 브로드웨이 쇼 출연 경험이 전무했던 페기 소여는 새로운 스타로 등극하고, 앙상블 배우들은 쇼에 고용되어 다시금 주급을 받게 되며, 과거의 프리마 돈나 도로시 브록은 스타의 강박을 벗고 사랑을 찾아 떠난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하지만 이러한 해피엔딩의 서사는 젠더적으로 아이러니한 지점을 품는다. 무명의 코러스 걸 페기가 사고로 갑작스레 공연에서 낙마한 도로시의 자리를 대신하는 과정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신인이 스타로 만개하는 낭만적 판타지로 묘사되지만, 이는 사실 여성-신인 배우가 남성-연출가에게 조련되어 브로드웨이 주류 무대에 등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뉴욕 공연까지 남은 36시간이라는 극히 제한된 ‘조건’,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이라는 페기의 출신 ‘지역’, 사회 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신인이라는 ‘처지’는 둘 사이의 위계를 더욱 부각시킨다. 페기는 줄리안이 말한 ‘브로드웨이적 생명력’을 자신의 꿈과 결합시키며 엄청난 분량의 대사와 노래와 춤을 빠르게 익히기로 결정하지만, 이를 위해 그녀는 줄리안에게 수면과 식사를 통제당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따라서 페기의 스타 등극은 자칫 브로드웨이 유명 연출가의 일방적 기획의 결과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줄리안의 이런 거친 면모는 팻 데닝에게 건달을 보내 공연에 방해될 수 있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려 한다든지, 아마추어에서 벗어나지 못한 페기를 가차 없이 해고하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브래드포드 로프스(Bradford Ropes)의 원작 소설 속 줄리안은 뮤지컬의 그보다 훨씬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지만, 남자 주연 배우인 빌리 로러의 동성 애인으로 사적 관계를 캐스팅에 반영하는 또 다른 스타일의 ‘브로드웨이적’ 존재다. 게다가 빌리는 줄리안의 에로틱한 집착을 이용하여 다른 게이 배우들을 막후에서 조종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줄리안에게는 본질적으로 브로드웨이 쇼 비즈니스의 생리를 대변하는 날 것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 장면 / 제공. CJ ENM, (주)샘컴퍼니
이번 2025년 논레플리카 한국 버전은 크로스 젠더 액팅으로 이런 줄리안에게 변화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박칼린이 연기하는 줄리안, 그러니까 여성의 얼굴을 한 줄리안이 추가됨으로써 새로운 젠더적 해석이 고무된다. 박칼린 배우의 회차는 캐릭터의 성별을 배우의 성별에 맞춰 극의 맥락까지 수정하는 젠더 벤딩(Gender-bending)의 가능성도 보인다. 줄리안은 변함없이 페기를 혹독하게 조련하는 존재로 고정되어 있지만, ‘프리티 레이디’ 공연 전후로 페기와 나누는 대화에서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후배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응원하는 큰언니와 같은 모습을 그림자처럼 비춘다.

“나갈 땐 신출내기지만 들어올 땐 스타로 들어와야 한다”는 대표적인 대사 장면과 끝까지 코러스 걸 동료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 페기를 칭찬하는 모습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는 스타에 대한 판타지가 줄리안에게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음탕한, 황홀한, 요란한, 화려한” 브로드웨이에서 페기와 같은 ‘꿈’을 꾸는 존재로서, 본질적인 순수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캐릭터의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보인다. 하지만 박칼린의 줄리안이 궁극적으로 구현한 것은 모호하고 이중적인 존재로서의 줄리안이다. 각진 남성 수트 이미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박칼린 ‘감독’의 한국 뮤지컬사적 위치가 묻어나는 캐릭터 표현은, 줄리안의 거칠고 투박한 본성을 거꾸로 부각시키는 동시에 거시적 차원의 자매애를 무대에 펼쳐놓는다.

라이선스 클래식 뮤지컬의 이러한 내적 변화는 60주년을 앞둔 한국 뮤지컬의 역사가 한층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칼린의 줄리안 마쉬와 더불어 최정원의 헤르메스는 1세대 여성 뮤지컬인들의 확장성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관찰하도록 이끈다. 한국 뮤지컬은 이제 다음 단계로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