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영천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야 도착할 수 있는 곳. 그렇게 몇 번의 환승 끝에 도착한 도시 ‘영천’은 많은 이들에게 아직 낯선 이름이다.
군사도시, 혹은 포항과 경주 사이의 경유지로만 기억되는 이 도시에, 장대비가 쏟아지던 7월 초 여름날, 조용히 들어섰다. 목적지는 영천에 있는 시안미술관.
시안미술관 전경 / 사진출처. 시안미술관 홈페이지
시안미술관은 경북 영천의 외곽, 오래전 폐교된 화산초등학교 가상분교 자리에 들어서 있다. 예전에는 4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다녔다는 이곳은, 학령인구 감소로 문을 닫은 뒤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을 돌며 폐교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던 미술관 관장 부부의 눈에 이 학교가 들어왔다.
가상분교는 지역주민 대부분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학교가 미술관으로 바뀐다는 소식은 공간변화 이상의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추억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상실감이었고, 공동체의 일부가 무너지는 듯한 불안이었다. 실제로 미술관 공사가 시작되던 초기에 마을의 반대가 적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미술관의 작은 선택들로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미술관이 전시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지역과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 되기 위한 노력 덕분이었다. 전시 행사를 찾은 방문객에게는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을 통해 밥이 제공되었고, 미술관 공사 현장에는 외지 인력이 아닌 마을 주민들이 참여했다. 미술관은 가능하면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지역에 맡겼고, 이는 단순한 배려를 넘어 지역에 실질적인 경제적 기회로 이어졌다.
그 변화의 징후는 담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미술관도 일반 시설처럼 담장을 두르고 출입을 제한했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그 담장을 먼저 허물기를 요청했다. “담장이 없어도 우리가 지켜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외부인의 시선이 아닌, 주인의 마음으로 미술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주민들은 미술관 행사에 맞춰 식당을 열고, 마당의 풀을 뽑고, 전시장의 관람객을 자연스럽게 맞이한다. 마을과 미술관 사이의 경계는 어느 순간 희미해졌고, 그곳엔 일상의 리듬 속으로 스며든 예술이 존재하고 있다.
영천9경 중 한곳, 별별미술마을 / 사진출처. 영천시 홈페이지
이처럼 시안미술관의 의미는 전시를 위한 건물 하나에 머무르지 않는다. 미술관은 영천시 문화예술과와 손잡고 인근 가상리 마을을 하나의 예술 벨트로 엮는 영천 9경 중 하나인 ‘별별미술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조선시대 6개 문중과 27채의 재실이 보존된 이 마을에는 전국에서 모인 작가들의 작품 60여 점이 설치되었고, 그 결과 가상리 마을은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별별미술마을에 있는 ‘바람소리’ / 사진출처. 영천시 홈페이지
‘별별미술마을’은 단지 한 마을의 재생 그 이상이다. 이는 미술관이 지역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이자, 예술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그러니 시안미술관에 오신다면, 바로 옆 ‘별별미술마을’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통신사환대도' (1655) / 사진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시안미술관은 스스로를 ‘예술통신사’라 부른다. 조선시대 통신사 행렬이 일본으로 향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인재와 지식, 문화가 하나로 모인 곳이 영천이었다. 통신사는 그 시대 동시대 지식과 예술, 사유의 집결체였고, 영천은 그러한 흐름이 시작되고 연결되는 중요한 장소였다.
시안미술관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과거 통신사가 지식과 문화를 교류하던 창구였다면, 오늘날 시안미술관은 예술을 매개로 지역과 시대를 넘나드는 담론을 주선한다. ‘예술통신사’라는 이름 아래, 미술관은 매년 동시대적 화두를 예술로 번역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적 사고의 교류를 시도한다.
시안미술관 특별전 <전해지지 않은 문장들: 여기에 그림자가 있다> 포스터 / 사진출처. 시안미술관
그 맥락에서, 2025년의 전시는 <전해지지 않은 문장들: 여기에 그림자가 있다> (2025.7.4~8.24)라는 제목으로 보이지 않았던 존재, 말해지지 못했던 서사, 외면당해온 감정의 파편에 주목한다. 사회가 정한 중심과 주변의 경계, 무심코 행해온 분류와 규정의 시선을 질문하며, 우리가 너무 쉽게 경계를 긋고 타인을 정의해버리는 일상의 언어 습관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전해지지 않은' 것들을 건드린다.
하지만 이렇게 관람객의 삶과 맞닿는 감동적인 전시도,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는 쉽게 지속되기 어렵다. 코로나19 이후 관람객 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미술관의 중요한 축이었던 단체 체험 프로그램 역시 대폭 축소되었다. 전시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한 운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단한 일이다. 입장료만으로는 공간을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지역문화재단의 지원도 예산과 범위의 한계에 부딪히기 일쑤다.
국비 지원은 대부분 일회성 사업에 그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술관의 자생력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예술이 감동으로만 남지 않고, 일상에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이에 시안미술관은 새로운 생존 전략을 구상 중이다. 정기 후원자를 모집하고, 후원자가 전시기획에 일부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또한 자체 아카이브를 활용한 출판과 온라인 콘텐츠 제작, 지역과 연계한 창작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자생력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감동적인 전시와 따뜻한 기획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제도적·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예술이 일상과 만나는 장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역 사회와 정책, 그리고 관람객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