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쇼스타코비치가 물었습니다. “슬라바, 만약 누군가가 무대 위에 있는 자네에게 돌을 던진다면 연주를 멈출 건가?” 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계속 연주할 겁니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지.”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2006년 《르 익스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하지만 20세기 중엽 소련의 공연장에서는 돌팔매보다 더 끔찍한 일도 일어나곤 했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저명한 음악가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던 시절. 올해 서거 50주년을 맞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는 그 한가운데서 활동했던 작곡가다. 음악과 정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던 그의 작품들에는 짙은 불안과 냉소가 드리워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병약하고 예민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갖은 굴곡을 지나면서도 이어갔던 창작열은 놀라울 따름이다. 검열과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고 곁을 지킨 벗들이 쇼스타코비치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중 가장 헌신적이었던 이를 꼽자면 전설적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1927~2007)를 빼놓을 수 없다. ‘슬라바’(러시아어로 ‘영광’을 뜻한다)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1959년 쇼스타코비치와 로스트로포비치. / 사진출처. miltonribeiro.ars.blog.br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갓 입학한 16세의 로스트로포비치는 그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의 악보를 들고 쇼스타코비치를 찾아갔다. 당시 ‘레닌그라드 교향곡’(교향곡 7번)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대작곡가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악보를 읽은 쇼스타코비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로스트로포비치는 그의 관현악법 수업에 받아들여졌다. 훗날 로스트로포비치는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만남’으로 이를 추억했다.
쇼스타코비치가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연주를 처음 들은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그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소련 전연방 콩쿠르에서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가 있었지만, 로스트로포비치는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다. 쇼스타코비치의 주장에 따라 다른 참가자들과의 현격한 기량 차이를 감안, 2위를 비워둔 압도적인 승리였다. 연주를 함께하며 두 사람은 가족에 버금가는 유대를 나누게 된다. 로스트로포비치는 2006년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쇼스타코비치 없이 저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늘 함께했고, 그는 제 모든 공연에 참석했지요.”
어둠 속, 서로의 등불이 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들이 겪었던 고난이 ‘친구들을 시험할 수 있었던 테스트’였다고 이야기했다. 진정한 친구들만이 끝까지 곁에 남았기 때문이다. 1948년 소련 음악계를 뒤흔들었던 ‘즈다노프 결의문’이 좋은 예였다. 소련 문화정책의 총책임자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성명에 따라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가 ‘형식주의자’로 낙인찍혀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던 사건이다. 하루아침에 음악원 교수직을 잃었고, 그의 작품들은 사실상 연주를 금지당했다. 쇼스타코비치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기까지 인민이 이해하기 쉬운 ‘선율적인’ 음악을 내놓으며 당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숙청을 두려워한 동료들이 빠르게 쇼스타코비치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로스트로포비치는 달랐다. 항의의 표시로 음악원을 중퇴했고, 모욕에 가담한 이들을 비판했다.
정치적 위기 외에도 로스트로포비치는 중요한 순간마다 쇼스타코비치의 힘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1971년 심장발작을 겪은 쇼스타코비치가 쿠르간의 정형외과로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 역시 그가 함께했다. 엘리자베스 윌슨의 쇼스타코비치 전기에 따르면 로스트로포비치는 당시 쿠르간 소재 악단과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로 꾸린 음악회를 열었고, 직접 벽돌을 나르며 정형외과 증축에 힘을 보탰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두 개의 첼로 협주곡을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해 그와의 우정을 기렸다. 쇼스타코비치의 헌정을 내심 기다리고 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1959년 협주곡 1번을 나흘 만에 완벽히 익혀 작곡가 앞에서 암보로 연주했다고 한다. 로스트로포비치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명인기를 담아낸 협주곡 1번에 비해 어둡고 내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협주곡 2번은 쇼스타코비치의 예순 살 생일을 기념해 1966년 작곡됐다.
사진출처. unsplash
1966년 세상에 나온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시에 의한 일곱 곡의 낭만 가곡’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쇼스타코비치에게 직접 작곡을 부탁한 경우다. 소프라노와 피아노 3중주를 위한 이 작품은 로스트로포비치와 소프라노인 그의 아내 갈리나 비시넵스카야가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가깝게 지냈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도 염두에 두었으며, 피아노는 쇼스타코비치 본인이 맡을 생각이었다. 친밀한 벗들의 모임이 담긴 작품인 셈이다.
로스트로포비치와 쇼스타코비치가 함께 녹음한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소나타가 유일하다. 쇼스타코비치가 오른손 마비를 겪기 전이었던 1950년대에 이들이 즐겨 연주했던 작품이다. 음질은 조악하지만, 오리지널리티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20년 후 지킨 약속
명실상부 소련을 대표하는 예술가였던 로스트로포비치 역시 정권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소련의 인권탄압을 고발한 솔제니친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고, 그를 옹호하는 편지를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여러 신문사에 발송했다. 연주를 금지당한 로스트로포비치는 결국 1974년 서방으로 망명했다. 소련 시민권 박탈이 1978년 뒤따랐다.
소련을 떠나기 전날,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쇼스타코비치를 찾았다. 작별의 자리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훗날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교향곡을 녹음하겠노라 약속했다. 노작곡가는 친구의 활약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약속은 잊히지 않았다.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20년이 흐른 후, 로스트로포비치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녹음을 완성한다. 교향곡 외에도 그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비롯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진력했다.
1990년, 로스트로포비치는 부인과 함께 26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보데비치 묘역에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묘를 찾은 것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2002년 쇼스타코비치가 젊은 시절 살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를 사들여 이를 쇼스타코비치 박물관으로 개조하기도 했다(아쉽게도 현재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이었던 2006년, 로스트로포비치는 세계 각지에서 열린 쇼스타코비치 페스티벌에서 그의 벗이자 스승을 추모했다. 악화된 건강에도 로스트로포비치의 열의는 뜨거웠다. 이듬해 세상을 떠난 그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옛 친구들이 잠들어 있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역에 안장됐다.
가장 어려울 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는 유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두 거장은 지금도 진정한 우정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