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생활자의 삶은 플러스마이너스 0일까. 번 만큼 소비하는 삶은, 생존이자 생활로 타성처럼 굳어 있다. 어떤 때는, 누가 얼마를 버는지보다도 얼마를 쓰는지로 그의 존재 가치가 평가되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세계를 살아가며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기보다, 열심히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감각은 나뿐일까. 이 쳇바퀴 속에서 남루함과 쓸쓸함을 느낀 건 언제부터였을까.
사진출처. unsplash
얼마 전 친구 집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어, 너도?”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나와 전공도 직업도 다르지만 우리는 역시 ‘김애란 키드’구나, 생각했다. 이미 한국문학 안에서 오롯한 좌표 하나로 당당하고도 담담하게 서 있는 작가 김애란을 사랑하는 독자군은 너무나 넓지만, 그래도 그를 영원히 ‘언니’로 기억할 우리가 명실공히 김애란 키드가 아닐까 감히 말해보고 싶다. 생활에 지쳐버렸던 지난날들에 작은 촛불을 올린 조각 케이크를 전해주곤 하던 김애란 단편소설을 하나하나 특별하게 기억하는 우리가.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를 읽으며 비좁은 셋방살이 대학생의 생채기에 침 발라가며 꿈을 키우던 이십대를 지나, 『비행운』의 단편 「서른」을 읽으며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터뜨리던 서른을 보냈고, 『바깥은 여름』을 따라 세월호 이후 긴 침묵 끝에 돌아온 작가와 마음을 포개어보기도 했다.
그런 김애란의 다섯 번째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마흔에 근접해가는 오늘 한 편씩 읽어가면서, 왠지 손가락이 자꾸만 따가웠다고 고백해본다. 단선적이지 않은 우리 시대의 계급성을 정확하게 포착해 서늘한 장면들로 비추어내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자꾸만 취침 시간을 늦춰가면서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이 따끔따끔했다. (스포를 할 수는 없지만 「숲속 작은 집」 마지막에 편지 부분에서는 어디선가 비수가 푹, 들어오는 느낌에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본화된 취향과 일상화된 금융 투기의 세태를 비웃으면서도, 내 안의 제국주의를 경계한다면서도, 도장 찍듯 매일의 소비로 스스로를 증명하며 틈만 나면 최저가 항공권을 검색하곤 했던 모순투성이의 도시 생활자의 손가락.
김애란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 / ⓒ 최지인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홈 파티」, p. 38)
촘촘한 연봉 그래프 사이에서, 금과 흙으로 구분되는 수저의 스펙트럼 위에서, 화폐의 가치 격차로 부리는 작고 큰 사치의 경험에서, 힘의 시소가 오르락내리락 춤을 추는 순간들. 그 교묘한 선 안에서 불투명해진 계급 안에서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 전세사기로 전 재산을 날려도, 땡볕 아래 한여름 더위로 일하던 사람이 쓰러져도, 우리는 그것을 언젠가부터 세계의 일부로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 건 또 언제부터였을까.
친구와 동료를 비롯해 정말로 많은 사람이 지금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있다. 그래서 이 코너에서 이 책을 소개해도 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김애란 키드로서 “탐나는 책”이라는 제목에 이보다 더 잘 맞는 소설을 찾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변명을 남겨본다. 그리고 내게 따끔따끔한 손가락으로 기억될 이 책이 있었기에, 내가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우리의 언니 김애란이 보여줄 그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우리를 위해, 시대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