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하게도 씨네필들의 높은 기대 속에 공개된 강미자 감독의 <봄밤>은 정서적으로는 다소 착지점이 불분명한 영화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두고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김수영의 시와 권여선의 단편 소설을 영화가 ‘시청각적 언어로 중층화 했다’는 표현도 나온다. 근데 이런 말 말 말은 우리가 다 알지만, 수사학에 불과한 것이다. 왕가위의 <일대종사>에 나오는 궁이(장쯔이)가 죽기 전 엽문(양조위)에게 하는 대사의 말투 같은 것이다. “인생에 후회가 없다는 말, 그거 다 그냥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영화 <봄밤>을 보고 레비나스를 말하고 시청각 언어니 중층화니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은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철학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는 착시를 가진 사람들의, 그저 ‘다 하는’ 얘기일 뿐이다. 영화 <봄밤>은 그냥 밑바닥에 대한 얘기이다. 사람의 마음, 그 밑바닥은 도대체 그리고 도저히 어디쯤일까 궁금해지는 그 ‘밑바닥’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 <봄밤>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김수영의 시는 말할 것도 없고 권여선의 소설은 애초에 영화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설정이 단 한 줄이다. 로그 라인이라 해 봐야 ‘죽어 가는 남자와 알코올중독으로 죽고 싶어 하는 여자의 비참한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에피소드가 없다. 여자는 줄창 술을 마시고 아파서 누워 있는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정도이다. 이런 식이라면 영화의 줄거리를 만들 수가 없다. 갈등의 전개가 없고, 파국과 결론을 낼 수가 없다. 영화가 종종 소설 원작을 확 바꾸는 이유이다. 에피소드를 일정 정도 만들어 내야 이야기를 조이고 풀어내는 완급의 리듬을 부여할 수 있다. 영화 <봄밤>은 이렇다 할 에피소드가 없다. 그래서 러닝타임이 65분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더 이상 끌고 갈 힘이 없어 보인다. 여주인공 영경(한예리)처럼 헉헉댄다. 병든 남자 주인공 수환(김설진)처럼 초췌하게 느껴진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스토리의 빈약함이 의도한 연출이냐 아니냐 하는 것, 그 가르마에서 찾아질 것이다. 감독 강미자는 그걸 의도했는가.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무엇이든 관객들이 이런 식의 (정밀한) 스토리의 부재를 받아들일 것이냐, 만족할 것이냐, 이다. 아마도 강미자는 영화를 단편 원작의 느낌 그대로, 그 길 그대로 따라갈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건 애초부터 시청각적 언어로의 중층화를 꾀했던 작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텍스트가 지닌 외형상의 평면성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소설에 동의하는 사람들, 그 정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한 사람이다. 소설은 내면적이다. 인물에게 아무런 행동 동기를 부여하지 않아도 단 한 줄의 묘사를 통해 그에게 동화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영화의 캐릭터는 앞단과 뒷단에 많은 힌트를 부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경의 밑바닥 슬픔의 단초는 어린 자식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상실이다. 남자 수환의 우울은 자신이 많은 것을 바쳐 일군 것을 전처가 다 가져갔고 건강도 잃었다는 것이다. 역시 상실이다. 소설은 그 상실의 지배성을 내면적으로 유지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같은 감정의 지속성에 이런저런 이유를 부여해야 한다. 약 20년 전에 아이를 잃은 여자는 오로지 그 이유로 술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오로지 그 이유로 매일같이 술을 퍼마실 수는 없다. 영화에서 영경이 술을 어마어마하게 마시는 이유를, 원작에서 더 나아가 좀 더 덧붙이고 윤색해서, 새로 만난 진심의 남자가 죽어 가고 있다는, 그 예고된 상실 때문임을, 그런 분위기를 좀 더 강화해서 보여줬다면 평론의 지나친 간섭이 될까.
영화 <봄밤>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는 워낙 짧아서 하워드 혹스 류의 ‘(좋은 영화는) 좋은 장면 세 개쯤(이 있다)’의 숫자를 채우기가 쉽지 않다. 그보다는 ‘애쓴 장면 세 개’가 더 눈에 보인다. <봄밤>에서 좋은 장면은 남자와 같이 요양원에 들어온 영경(남자는 류마티즘으로 여자는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해)이 너무나 술을 먹고 싶어 하며 외출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남자는 말한다. “걱정말고 나갔다 와. 너무 애쓰지 말고 나가서 편하게 (술 마시다) 있다가 다시 들어와.” 이때 여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말한다. “도저히, 안 나가겠다는 말을 못 하겠어.” 밑바닥이다. 여자는 남자가 아픈 문제보다 자신이 술을 먹고 싶어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욕망이 이성을 이긴다. 그 욕망은 이기적인 것이며 그래서 인간적인 것인데, 그건 또 어느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굳이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까지 나아갈 필요도 없다.
레비나스보다는 키르케고르적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실존을 증명해 나가야 하는, 의식적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불안·공포·전율의 문제가 대두한다는 것이다. 영경과 수환의 문제는 깊은 상실감으로 인한 존재 자체의 불안이다. 이 수렁에 빠지면 인간은 대체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신은 그런 인간을 가엾이 여기고 긍휼히 여긴다. 존재의 불안감에 떠는 인간이 신에 귀의하는 이유이다. 영경은 신 대신 술에 기댈 뿐이다. 그녀는 소주잔을 계속해서 입 안으로 털어 넣으며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남자는 ‘죽을 수는(죽는 게 더 쉬울 수는) 있다’고 말한다.
영경의 중독성 음주는 살고 싶어 하는 안간힘일 수 있다(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취기가 유행처럼 따라가고 싶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연히 애처롭다. 영화 <봄밤>은 두 남녀의 모습이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영화 <봄밤>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이렇다 할 에피소드도 없고 저예산의 한계상 스타일리쉬한 촬영이나 미술이 첨가될 수 없는 상황에서 강미자가 뚫고 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배우들의 연기였을 것이다. 한예리의 ‘소주 연기’는 마시는 품새가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소주의 그 자극, 코로 뿜어져 나오는 다소 역한 기운, 그리고 무엇보다 땀구멍으로까지 새어 나오는 냄새, 그런 느낌이 나도록 연기를 해야 한다. 한예리가 그걸 해낸다. 그녀가 편의점 구석에 앉아 맥주 캔을 따고 처음에 그 일부를 마셔 공간을 만든 후 거기에 소주를 타서 마시는 장면은 진짜 술 중독자의 모습이다. 잭 레먼과 리 레믹이 나왔던 1962년 영화 <술과 장미의 나날>에서 마시고 또 마시고 또 마시는 잭 레먼이 생각이 난다. 이 영화의 반은 한예리의 소주 연기와 김설진의 퀭한 눈빛 연기가 해냈다. 두 연인은 섹스보다는 포옹의 결합이 더 중요하다. 영화에서 둘은 종종 땅바닥에서 뒹굴며 서로의 몸을 결박한다. 그런 모습을 마치 한편의 회화처럼,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처럼 찍었다.
슬픔의 시대이다. 인생 자체가 그렇다. 영화 <봄밤>에 대해 애초부터 다른 기대는 있을 수 없다. 자신을 들여다본 후,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라는 식의 정치주의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슬픔의 밑바닥에 내려가는 것, 그 진수를 깨닫는 것, 그래서 역설적으로 다시 살아 내는 것 역시 인생의 위대한 승리와 같은 일이다. 슬퍼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봄밤>은 버릴 수 없는 연인과 같은 작품이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애인과 같은 영화이다. <봄밤>을 본다는 것은 밑바닥 슬픔, 그 가엾음을 본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7월 9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