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들은 말이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자꾸만 상기하게 되는 그런 말들이 있다. 언젠가 수업 시간에 한 친구가 ‘건축은 하면 할수록 죄를 짓는 일이다’라는 한 건축가의 말을 인용했다. 그 당시에는 이 말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지금까지도 그 말을 한 친구가 누구인지, 또 어떤 맥락에서 인용했는지 기억하는 걸 보면 사실 이 말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그때는 속으로 그런 생각은 다소 자기 모순적인 게 아닐까? 라고만 생각했었고 그게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기에 그 건축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 모순적 경향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 중 가장 모순적인 것 중 하나는 공간에 관한 것이다. 난 분명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에 살기를 원하지만 눈으로 보았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쪽은 이 안전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공간은 가상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니 이건 공간이라기보다는 한낱 이미지에 불과하다. 문명이 사라진 도시의 외피는 반듯함과 완결성을 잃고 안과 밖의 경계를 이루던 벽은 허물어졌다. 갈라진 돌 틈 사이에서 식물들은 마치 그 돌들보다 더 질기기라도 한 듯 돋아나 있다. 인간의 손에 의해 깎이고 새겨졌던 도시의 표면은 자연의 돋을새김으로 뒤덮여있다. 이제 도시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동물들이 신명 난 뜀박질과 함께 등장한다. 내게 심리적 편안함을 주는 공간의 이미지는 이상하게도 그런 폐허 속에서 쌓아 올린 낙원들,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등장하는 도시들이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컨셉 아트 / 이미지. © Justin Wentz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컨셉 아트 / 이미지. © Justin Wentz
왜 이런 모순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스스로 분석을 해본 적이 있는데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었다.

첫 번째는 그런 아포칼립스 환경에서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이 매우 단순해진다는 점이다. 무기를 들고서 괴물로부터 내 가족을 지키고 생존을 추구하는 것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죄를 짓는 일이 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자산을 구축하는 일이나 사회적 성공도 중요하지 않으며, 생존을 위해 뜨겁게 투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실존적인 삶이 된다.

두 번째는 공간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석인데 이런 아포칼립스 세계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공존이라는 측면에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창밖에 숲의 끝자락만 보여도 그 아파트 이름에는 숲이 붙고, 요즈음 새로이 생겨나는 도서관들은 유행처럼 숲속 도서관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건설된 도시의 외벽 안에 존재하지만 이런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는 개인화된 삶의 표면이 도시의 외피가 된다. 어쩌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편리함과 쾌적함을 주는 현대식 공간에 살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는 그 정반대의 공간에 대한 욕구가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드라마나 영화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아닐까?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는 정말 많다. 그중에서 가장 내가 꿈꾸는 폐허 속의 낙원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을 꼽으라면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의 공간들이다. 대체로 게임 속 공간은 전투를 위한 배경에 불과하거나 레벨 디자인과 같은 다른 요소에 종속된다. 하지만 이 <라스트 오브 어스>는 다르다. 이 게임은 공간에 게임의 전개가 종속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 게임 속의 인물들은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높은 지대로 올라가 주변 지리를 파악한다. 그곳에서 목표 지점을 파악한 인물들은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최적의 경로를 설정한다. 그리고 또 다른 게임과 달리 인물들이 전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간에서 풍경을 즐기는 장면이 등장하는 데 예를 들면 주인공인 엘리가 파괴된 빌딩 숲 사이를 거니는 기린을 보고 즐거워하는 장면이다.
HBO Max 드라마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 1, 9화의 한 장면 / 출처. IMDb
HBO Max 드라마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 1, 9화의 한 장면 / 출처. IMDb
또 많은 게임이 생존과 전투를 위한 아이템의 획득에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달리 이 게임에서는 개인의 취향과 삶의 질을 위한 아이템의 획득도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면 조엘이 엘리에게 기타를 수리하여 선물하거나 연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엘리가 만화책을 획득하고 기뻐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경기장이나 공연장과 같은 기존 공간의 기능을 무시하고 어떠한 공간이든 점령하고 개인화하여 자신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렇게 망가지고 허물어진 그 폐허 위에 자신들의 개인화된 삶을 쌓아 올린다. 허물어지고 파괴된 물질적 디스토피아 위로 아주 단순하고 의미 충만한 정신적 유토피아가 쌓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적 공간의 출발점은 선을 긋고 기능에 따라 구획하는 것이다. 일본 도쿄에 위치한 포레스트게이트는 이름과 달리 경계병이 지키고 있거나 차단봉이 막아서거나 하지 않는다. 누구나 이곳을 경유하여 다이칸야마 역에서 반대편의 상점가로 건너갈 수 있는 열려있는 통로다.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다이칸야마 역 쪽에서 연결되는 입구를 바라보면 특정 건물로 들어서는 입구라기보다 오래전부터 형성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작은 가게들의 돌출된 부분, 화단이나 작은 지붕 등 삐져나온 구조물들이 길의 형태를 형성한다.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계단 구조의 벤치들이 화단 사이에 형성되어있다. 그리고 그 벤치의 형태감은 그대로 건물의 외벽으로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현대식 건물들처럼 최첨단 기술로 건설된 느낌이 아니라 마치 아포칼립스 세계의 공간들처럼 나무 상자들을 끌어모아 조금씩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인다. 숲속의 나무들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면서도 주변 환경에 맞추어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가지를 뻗고 잎을 더 풍성하게 틔우거나 하는 것처럼 이 건물도 일관된 컨셉 하에 명료한 형태를 지니는 대신에 사람들이 마치 삶의 필요에 따라 조금씩 쌓아 올린 듯 유기적이고 다채로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독특한 공간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건축은 하면 할수록 죄를 짓는 일이다’고 말한 건축가의 철학인 것이다.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건축가 구마 겐고는 건축의 외부 형태보다 주변과의 관계를 더 강조한다. 현대 건축의 특징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여나가는 쪽으로 접근한다. 기능성을 위해 경계를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우개를 가져다 댄다. 동선으로 만들어지는 구조에 의해 희미해진 경계가 있는가 하면 어둡게 형성된 통로의 한쪽 면에 통유리를 배치하여 뒤편의 풀숲을 반사하도록 하고 마치 사람들이 그 풀숲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 보이게 하는 등 소재로 구현된 경계의 투명함도 있다. 또 그 건물이 이루고 있는 외부의 형태 또한 명료하고 반듯한 선을 그리기보다는 다채롭고 복잡한 표면을 형성한다. 그래서 이 공간은 자연적으로 자라난 그 무엇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이런 유기적 특성은 근대 건축이 아닌 토속 건축의 특징이다. 지형의 형태나 주변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어진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삶의 형태에 따라 형성된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풍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아포칼립스 세계의 공간이 정신적 낙원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정교한 도시계획, 즉 합리성과 기능성 안에 현대인의 삶이 갇히는 것과 이 세계에서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외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포레스트게이트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위를 올려다보아도 우리에게 익숙한 콘크리트나 금속, 유리 대신에 여러 겹으로 쌓인 나무와 그 틈 사이로 듬성듬성 자라난 식물들이 보인다. 그래서 내게는 이 포레스트게이트의 첫인상이 마치 아포칼립스 세계의 공간들처럼 느껴졌다.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구마 겐고가 설계한 포레스트게이트 다이칸야마 / 사진. © 박정민
경계를 그음으로써 기능할 수 있는 공간에 경계를 희미하게 하고, 숲을 파괴하는 것인 운명인 건축에 숲과의 공존이라는 이 건축가의 모순적인 꿈은 그렇게 가상의 컨셉 이미지가 아닌 실제 공간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이곳은 아포칼립스 세계가 아니기에 공간의 다양한 기능 또한 품어내고 있다. 내게는 몸이 원하는 현대의 편리하고 쾌적한 공간과 마음이 이끌리는 자연과 공존하는 묵시록적 공간이 한데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집합주택이라면 모여 살면서도 행복한 삶의 추구가 가능해질 것 같았다. 모순되고 상충하는 듯했던 두 갈래의 공간적 욕구가 여기에서는 정말로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이다.

박정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