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를 통해 마주하는
시부야의 환대와 그 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순간
‘난 결국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죽게 되겠구나.’
타인에게는 사소한 문제지만 개인적으로만 중요해지는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생각을 하기 바로 전까지도 그 도시의 안티테제와 같은 공간을 향한 환상이 마음속에 항상 있었다. 언젠가는 이 도시를 벗어나 나와 부대끼는 익명의 존재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도 알게 해주는 이곳을 벗어나서, 효율성 따위는 걷어찬 데드 스페이스가 넘쳐나는 공간에서 신발을 신거나 벗고 의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사치스럽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의 콘크리트 동굴 같은 걸 만들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얼마간은 고요한 호수 앞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그런 정적의 호수 앞에서 창작력이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군중의 호수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대도시의 번잡함 속에서만이 느껴지는 아주 시끄러운 고독이 필요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난 내가 후자 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전원 속에서 살게 되리라는 막연한 꿈을 버리고 도시에서 살다가 도시에서 죽게 되리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특정한 공간을 찾아 헤매게 되는 이유는 그 공간에서만 가능한 시간에 대한 욕구다. 언젠가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났다. 영원히 그걸 반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 번 혹은 세 번까지는 그 시간을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곳은 평범한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가장 안쪽의 원형 테이블에는 허연 수염을 체크무늬 남방 위로 드리운 할아버지가 커다란 건축 도면으로 테이블을 뒤덮고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고 동행이 있는 테이블은 단 하나였는데 대단히 조곤조곤 말을 하고 있어 마치 거기에는 어떤 암묵적 합의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합의는 마치 카메라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듯 공기 중에서 일어난 포말의 한 형태를 고정된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박제된 그 공간의 이미지에는 어떤 허용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시도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것이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그 이후로 수년간 난 그 순간을 되찾기 위해 온갖 공간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공간이 가진 특수성을 통해 굳이 대사나 내레이션으로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말하는 그런 감독들이 있다. 빔 벤더스는 확실히 그런 감독 중 한 명이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천사는 도시에서 가장 낮은 공간인 수로 주변을 걷고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 )>(1987),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물은 철도 위를 위태롭게 걷다가 반사 유리를 사이에 두고 전처와 재회한다 <파리, 텍사스(Paris, Texas)>(1984). 삶에서 혼돈만을 느끼는 청춘은 옥상 위에서 달린다 <밀리언 달러 호텔(The Million Dollar Hotel)>(2000).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2023)는 원래 이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홍보 영상 의뢰로 시작되었지만, 빔 벤더스가 먼저 이것을 장편 영화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만들었다고 여러 번 밝힌 바 있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오마주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성을 히라야마로 설정하고,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키는 독서 장면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가 그에게 남긴 인상에서 솟아오른 어떤 영화적 이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화장실은 가장 공공의 영역이며 또 모두가 평등해지는 공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미 여러 번 방문한 도시일지라도 거장이 그 도시를 어떻게 무대장치로 활용했는지 그 시선을 따라 바라보게 되면 그 도시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난 그의 시선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 도시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싶었다.
반 시게루는 소재의 특수성으로 공간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건축가다. 개인적으로 올림픽공원에 있었던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의 거대한 종이 기둥으로 구성된 포르티코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몇 년 만에 사라진 것이 아쉽기도 했다. 이 화장실 또한 소재의 특수함을 활용해 양방향으로 그 반대편의 풍경을 투과시키는 화장실이 불투명한 공간으로 변한다. 앞서 안도 다다오의 아마야도리가 구조적으로 개방성과 보호받는 감각을 동시에 제공한다면 이 곳은 소재를 통해 그것을 구현하고 있었다.
화장실이 ‘어서 오세요’라며 마중을 나오는 것도 아니니 실제 공간에서 환대라는 문화를 느끼는 것은 어렵다.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구상되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때야 어렴풋이 가늠해 볼 따름이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공간을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곳을 방문했다가 들를 수 있고, 젠더나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접근 가능성을 높인 세심한 배려들이 숨어있다. 영화에서 보던 겐조에서 디자인한 그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분들이 수시로 등장해 청결을 유지했다. 그것이 바로 이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가 말하는 환대인 것이다.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 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이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시부야의 곳곳에는 모두를 향해 열려있는 공간들이 많은 편이었다. 예를 들면 굳이 유명한 시부야 스카이를 가지 않더라도 그 옆 건물에 가면 도시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누구에게 열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그런 공간에 들어서면서 누군가가 나를 제지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일게 마련이다. (특히 카메라와 같은 장비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는 빌딩을 들어섰을 때 누군가 막아서거나 구석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로 안내받는 경험이 익숙할 것이다) 누군가 나와서 환대를 해주진 않았지만, 누구도 무슨 용무로 왔는지 물어보거나 막아서지 않아 놀라기도 했다. 문득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동경 이야기>(1953)에서 히라야마 노부부가 자식들이 아니라 남편과 몇 년 전 사별한 며느리의 환대를 받는 장면이 떠올랐다.
앞서 말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그 흔한 스타벅스였고, 그곳은 도쿄에서도 가장 재미없어 보이는 아카사카였다. 물론 그곳에 다시 가보았지만, 그때의 그 분위기는 더 이상 없었다. 도쿄는 서구권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고요하고 정적인 도시가 아니다. 또 근래에 집중된 투어리즘으로 쌓인 스트레스가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처럼 가장 높고 빛나는 공간의 설계가 아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모두가 평등해지는 그런 공간의 설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그 정신이 바로 이 도시가 말하는 환대다. 또 그런 환대 속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도쿄 특히 이 시부야는 그 어느 도시보다 시끄러운 곳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포말 속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시끄러운 고독을 마주하게 하는 두 얼굴의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