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이제는 아득히 먼 기억처럼 느껴진다. H 선생님을 만난 것은 한창 직장 생활에 바빴던 어느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한창 진공관 프리앰프 삼매경에 빠져있었고, 나와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내 집을 들락거리는 일이 많았다. 그때 나의 오디오 리서치를 불하받으려 당진에서 올라오신 한 어르신.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으셔서 오디오라는 공동 관심사가 아니었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분이었다. 인연이었는지 오디오에 관해 얘기하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동호인이라는 건 단순히 동일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란 걸 그때 알았다. 요즘엔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친목을 다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오프라인에서 활동은 적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때만 해도 온라인처럼 잦은 대화가 오가진 않아도 가끔씩 있는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그간 모아놓은 이야기보따리를 풀곤 했다. 시간은 어김없이 주변을 변화시키며 나이를 먹게 했다. 선생님은 퇴직했고 경기도의 한적한 집에서 노후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클래식 음악광이었고 오디오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이셨다. 메인 시스템은 신품으로 치면 수천만 대였고 하루 종일 음악만 들어도 심심하지 않으신 분이었다.

그간 선생님이 사용하셨던 기기는 내게도 익히 친숙했다. 자주 뵙진 못했지만, 오디오와 관련된 일이 있으면 때마다 나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턴테이블을 세팅한다던가 새로운 카트리지를 장착하려는데 눈이 침침하시면 나를 찾으셨고 나도 흔쾌히 응했다. 처음 놀랐던 건 영국 PMC에서 오래전에 출시했었던 AB1이라는 스피커였다. 그리고 그 PMC 스피커엔 반드시 아큐페이즈 인티앰프를 매칭해서 사용하셨다. 10년도 훌쩍 더 지난 최근 내가 아큐페이즈 최신형 인티앰프를 쓰고 있는데 왜 PMC와 매칭을 고집하셨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오디오 이론에 해박하신 분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음악 감상으로 다져진 감각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 PMC의 AB1 스피커
영국 PMC의 AB1 스피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 댁에 갔더니 메인 시스템을 듣지 않고 케프 LS3/5A를 듣고 계셨다. 후면엔 레이먼드 쿡 사장의 사인이 선명한 레어 아이템! 축하의 인사와 함께 현악 사중주 한 곡을 LP로 즐기는데 고역은 유려하게 뻗어갔고 특히 현악기의 질감이 잘 살았다. 시쳇말로 피어오르는 듯 나긋나긋하게 배음을 뿌렸다. 내가 기존에 들었던 케프 LS3/5A의 그저 정직한 모니터 사운드와는 확연히 달랐다.
케프 LS3/5A
케프 LS3/5A
아뿔싸. 나는 그 소리가 당연히 메인 앰프인 플리니우스 파워앰프와 오디오 리서치 프리앰프 조합에서 나온 줄 알았다. 장식장 저 안에 납작 엎드려있는 작은 인티 앰프가 들려주는 소리란다. 당시 LS3/5A와 조합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대체로 네임오디오나 쿼드 같은 앰프들을 주로 매칭해서 듣던 BBC 모니터에서 이런 소리가? 이렇게 오라 VA100과 EAR 834P 포노앰프, 린 LP12 그리고 케프 LS3/5A는 선생님의 노년 음악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나도 오라를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뮤지컬 피델리티 A1X 등 A 시리즈 인티앰프와 오라의 VA50, 100 등의 인티앰프는 영국 앰프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모델들이다. EAR 진공관 앰프로 유명한 진공관 설계의 레전드 파라비치니의 손길이 미친 뮤지컬 피델리티 그리고 당시 B&W가 한 때 소유했던 오라. 그리 크지 않은 출력에 열이 많이 나서 상판에 계란 프라이를 해 먹어도 될 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음색만큼은 어떤 대출력 앰프보다 매력적이었다. 특히 실내악이나 성악, 재즈 보컬 등에서 펼쳐지는 따스하고 작은 소리 입자의 분진들이 방 안을 포근하게 감쌌다. 이후 오라는 일본에서 다시 태어나기도 했으며 국내에선 에이프릴 뮤직이 오라 브랜드로 여러 종류의 제품을 제작해 내기도 했다. 나 또한 무척 좋아하는 브랜드라서 지금도 책상 머리맡에는 ‘오라 노트’라는 올인원 앰프가 가지런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오라 앰프
오라 앰프
오라 VA100과 케프 LS3/5A를 즐겨 듣던 H 선생님. 날이 갈수록 그분은 메인 시스템보다 오라와 케프 그리고 LP12로 구성된 서브 시스템으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종종 소식을 전해왔다. 실제로 소리를 들어보러 한 시간 남짓을 달려갔다가 매운탕 한 사발에 소주라도 한잔하는 날이면 그 소리는 깊게 우려낸 사골국물처럼 더욱 진하게 들렸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북셀프 스피커라면 ATC SCM20SL, 다인오디오 25주년, 포칼 마이크로 유토피아 BE 등 더 크고 우람하며 멋진 외관을 가진 것들이 있었다. 선생님도 다인오디오 25주년을 한창 길들이면서 들으셨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말년에 대부분 LS3/5A와 오라 앰프 그리고 린 LP12로 음악을 함께했다.
린 LP12
린 LP12
어느 날 선생님은 그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떠났다. 정년까지 먼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그 좋아하던 음악이 허락된 시간은 고작 하루이틀의 주말뿐이었던 선생님. 은퇴 이후의 짧은 시간을 뒤로 하고 영면에 들었다. 그분의 영면과 함께 오라와 케프 LS3/5A도 잊었고 그때 그 소리도 기억 저편으로 아득히 사라졌다. 같은 오디오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해도 절대 그 당시 선생님과 함께 듣던 그 소리는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최근 오디오 뉴스엔 신기술과 그것을 접목한 신제품 소식으로 가득하다. 직업으로서의 평론가인 나는 종종 스펙을 분석하고 설계의 원론을 공부한다. 때론 측정치를 찾아보고 분석하기도 한다. 또 한 편에선 기업들이 하이파이 오디오 메이커를 인수, 합병하는 소식들이 난무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제품의 스펙과 기술, 그리고 비즈니스 면에서 브랜드와 제품을 분석하고 가치를 매긴다. 음악의 재생 도구로서 오디오는 한낱 물건으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맞다.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태풍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간 나머지 과거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가치는 허물어지고 있다. 아마도 하이파이, 하이엔드 오디오는 그 자본주의, 탐욕의 중심에 자리 잡은 사치품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내게로 오는 데는 각각 이유가 있다. 내게 어떤 물건이 온다면 그때부터 그건 단순한 물건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당시 H 선생님이 음악을 들을 때 사용했던 그 오디오는 단순한 도구 이상이었다. 마치 그 당시 소리엔 H 선생님의 지문이라도 남아 있었던 게 아닐지.

코난 오디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