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딩딩딩” 이 여섯 글자에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숏폼 플랫폼에서 밈이 된 노래 #괜찮아챌린지의 한 구절이다. 중독성 있는 멜로디 탓에 많은 인기를 끌었고, 연예인, 인플루언서까지 그 챌린지에 동참하며 파급력은 더욱 커졌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베트남 래퍼 7dnight이다. 그의 백그라운드 스토리는 흥미롭다. 그는 한국에서 7년간 블루칼라 노동자로 일했다. 이후 자국으로 돌아가 베트남판 <쇼미더머니>에서 이 노래 <KHÔNG SAO CẢ>를 선보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단순히 후렴구만 한국어인 것이 아니다. 전체 가사에는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겪은 고통과 그럼에도 ‘괜찮다’고 말하려는 희망이 녹아 있다. 뮤직비디오 배경이 익숙한 한국어가 보이는 공장들과 안양일번가 거리라는 점은 그의 음악이 그저 한국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곳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외국인 노동자 100만 명 시대. 우리 사회 속에 있으나 보이지 않았던 어떤 삶이 문화 콘텐츠로 떠오른 순간이다.
[KHÔNG SAO CẢ (Feat. 7dnight)]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I’m no longer here>는 멕시코 북부 도시 몬테레이에 사는 17세 소년 울리세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울리세스는 느리고 몽환적인 리듬의 쿰비아를 사랑한다. 그에게 이 음악과 춤은 단순한 취향이나 패션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해 가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특히 그가 속한 ‘테르코스’라는 또래 집단에게 쿰비아는 소속감을 확인하게 해주는 문화였고, 도시의 폭력과 불안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도피처이기도 했다. 쿰비아는 몬테레이를 비롯한 멕시코 북부에서 하층 계층의 정체성과 공동체를 상징하는 문화적 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울리세스에게 춤을 잃는다는 건 단지 음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는 것과도 같았다.
영화 'I’m no longer here'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그러나 갱단의 위협이 자신의 가족에게까지 사무치면서 울리세스는 어쩔 수 없이 몬테레이를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하게 된다. 낯선 도시에서 그는 언어적 장벽과 문화적 고립 속에 허덕인다. 그 삶은 마치 7dnight의 노래 속 정서와 맞닿아 있다. 한국에 사는 베트남인, 미국에 사는 멕시코인의 처지는 놀라울 만큼 비슷한 것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온 ‘아메리칸 드림’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도시에서 그가 사랑한 쿰비아는 낯설고 기이한 것으로만 여겨진다. 흐느적거리는 춤, 닭 볏 같은 머리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집으로 전화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어머니는 돌아오면 죽음뿐이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고향,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타지 사이에서 17세 소년은 끝없이 흔들린다.
그에게 따뜻한 손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린이라는 중국계 소녀는 울리세스를 향한 호기심을 건넨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조력자인 그녀는 쿰비아 스타일로 머리를 염색하고, 옷을 입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그 호의에 울리세스도 점차 마음을 연다. 식당에서 설탕 위에 몬테레이의 지형을 그리며 자신의 공동체에 대해 설명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린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티에 함께 간 날, 울리세스는 그녀가 어느새 흑인 문화의 하나인 트월킹 춤을 배우는 것을 보고 좌절한다. 자신이 지켜온 문화가 그녀에게는 그저 따라 해 볼 만한 스타일의 하나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영화 'I’m no longer here'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사실 린의 호의는 어디까지나 울리세스의 껍데기에 대한 흥미였을지 모른다. 특이한 헤어스타일, 다른 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존재가 주는 신비로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울리세스는 그저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춤을 통해 정체성과 공동체의 기억을 복원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린에게 쿰비아가 그의 정체성의 언어임을 알지 못했다. 린은 그의 춤을 따라 했지만, 그 춤에 녹아든 그의 세상을 보진 못했다. 홀로 파티를 빠져나와 울리세스가 찾아간 사람은 나이 든 여성 글라디스였다. 글라디스는 울리세스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침묵을 존중했다. 춤을 강요하지도, 질문을 퍼붓지도 않았다. 울리세스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 사람이었다.
결국 울리세스는 뉴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몬테레이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고향은 예전과 다르다. 같은 춤을 추던 친구는 어느새 래퍼가 되었고, 도시는 주민들의 폭동으로 들끓는다. 경찰과 폭도들이 일촉즉발 하는 순간, 울리세스는 쿰비아 음악을 틀고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한다. 음악이 울리세스를 감싸던 순간, 그는 오랜만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느낀다. 그러나 MP3의 배터리가 끊겨 음악은 허무하게 꺼지고, 춤은 멈춘다. 결국 그가 지키고 싶었던 세계는, 그 음악처럼 조용히 사라진다.
울리세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7dnight이 떠오른다. 우리는 ‘괜찮아 딩딩딩’을 따라 부르며 그 유쾌함을 즐겼지만, 정작 그 말은 누군가 하루를 버티기 위해 속으로 삼켰던 말이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말투와 낯선 억양의 랩을 신기하게 여기며 소비했던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지나쳐 온 건 아닐까.
7dnight / 사진출처. 7dnight 페이스북
오늘날 우리는 주변에서 다른 언어와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을 쉽게 마주친다.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진 울리세스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한국말을 잘하는지, 한국문화를 얼마나 익숙하게 따르는지에 따라 내 호감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I’m no longer here>는 그렇게 취사선택하듯 정체성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문화는 옷처럼 갈아입는 게 아니다. 울리세스의 삶은, 그 뿌리를 잃는 일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우리에게 말해준다.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건, 그가 보내온 시간, 고통,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와 다른 외모, 언어에만 주목하며 흥미롭게 소비하는 시선은, 정작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글라디스처럼 말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존중이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겠다.
우리가 무심히 또 다른 쇼츠를 향해 스와이프하는 사이에, 영화 속 울리세스도, 현실의 7dnight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괜찮아’를 되뇌었던 건 분명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자조적 말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이들이 우리의 거리에서 랩을 하고 춤을 춘다면, 이번에는 먼저 그들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