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이하 『시라노』)는 1879년 발표된 후 연극과 뮤지컬,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로 재탄생하며 오랜 기간 관객들을 사로잡은 희곡이다. 최근에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과 류정한의 프로듀싱, 그리고 최재림을 비롯한 스타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던 뮤지컬 <시라노>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의 타이틀롤이라고 할 수 있는 시라노 드 베르주락은 탁월한 검술 실력과 문장력을 갖춘 17세기 프랑스의 군인이자 시인이다. 하지만 그는 범상치 않은 크기의 거대한 코로 인해 외모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사촌 록산느를 짝사랑하지만, 록산느의 사랑은 시라노와 같은 부대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는 크리스티앙 뇌빌레뜨를 향한다. 크리스티앙 또한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크리스티앙은 출중한 외모와 달리 부족한 언변으로 인해 록산느가 실망할까 걱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라노는 한 가지 대책을 세운다. 크리스티앙의 겉모습 뒤에 숨어 자신의 언어로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과 외면이 되어주며 사랑의 합동작전을 시작한다.
뮤지컬 <시라노> 2024년도 공연. 배우 최재림이 시라노 역을 맡았다. / 사진. ⓒ RG컴퍼니/CJ ENM
뮤지컬 <시라노> 2024년도 공연. 배우 최재림이 시라노 역을 맡았다. / 사진. ⓒ RG컴퍼니/CJ ENM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삼각관계를 기발하게 풀어낸 설정이 『시라노』가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설정은 오늘날의 창작자들에게도 상당한 영감을 불어넣었고, 현대적인 재해석 또한 다채롭게 이루어졌다. 2010년 개봉한 이민정, 최다니엘 주연의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는 ’사랑을 도와주는 남자’라는 설정을 한국식 로맨틱코미디의 문법으로 풀어냈고, 2020년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반쪽의 이야기>에서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자 고등학생이 두 사람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가는 하이틴로맨스로 재탄생했다.

게다가 『시라노』 속 인물들은 신분이나 계급, 가문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감정을 따라가며 사랑을 이어간다. 이전의 고전들 속에 비춰진 사랑의 서사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의 주체로서 ‘개인’을 조명하며 현대적인 로맨스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은 현대적인 재해석 과정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여전히 관객과 창작자들의 애정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스틸 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이 희곡을 원작으로 한 국립극단의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이하 <록산느>)도 이와 같은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10주년을 맞이한 <록산느>는 2015년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초연한 이후, 2017년 재공연을 거쳐 8년 만에 명동예술극장이라는 더 큰 무대로 돌아왔다. 이번 시즌에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지방공연을 통해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으며, 동명의 희곡집도 출간되어 책으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록산느>는 『시라노』의 시대적 배경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4명의 인물에 집중해 서사를 간결하게 만들어낸다. 록산느를 중심으로,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그리고 그들의 상관이자 역시나 록산느를 짝사랑하는 드 기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배우들의 유쾌하고 활기 넘치는 움직임과 유머, 그리고 무대 위에 함께하는 2명의 코러스 배우와 3인조 라이브 밴드가 간소화된 등장인물의 빈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며 공연의 밀도를 높인다.

<록산느>는 그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 ‘록산느’를 중심으로 『시라노』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간다. 특히나 록산느에게 주체적인 서사를 부여하고자 한 시도가 눈에 띈다. 물론 원작의 스토리를 계승한 만큼 시라노의 비중이 상당하지만, 록산느를 향한 시선이 깊어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원작에서의 록산느가 남성 인물들의 사랑을 기다리며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입장이었다면, <록산느>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를테면, ‘록산느’라는 이름에 담긴 설정에서부터 이러한 시도가 담겨있다. 원래 그의 본명은 ‘마드를렌 로뱅’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록산느’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새로워진 록산느는 자신의 본명인 ’마그들렌 로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이름을 선택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록산느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남성을 동경하며, 시라노의 언변과 크리스티앙의 합동작전도 이것 때문에 시작된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을 동경의 마음으로 흠모하는 원작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본인 스스로도 그에 상응한 능력을 가지고 함께 문학적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소울메이트’를 찾는 인물로 재해석되었다.
국립극단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2025년 공연 장면. / 사진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2025년 공연 장면. / 사진제공. 국립극단
원작의 인물을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록산느의 서사는 더욱 입체화된다. 특히 마을 빵집을 운영하는 라그노라는 인물이 사라지면서 일부 설정이 록산느에게 부여된다. <록산느>를 통해 록산느는 스스로 식료품점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재탄생한다. 특히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마을과 함께 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업 철학을 가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원작에서 록산느가 베푼 온정이 라그노라는 인물을 통해 가능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시라노가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랑을 ‘받는’ 대상에서 사랑을 ‘하는’ 주체로 변화한 록산느의 모습은 전쟁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드 기슈가 속한 부대가 출정을 나간 후, 그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사기를 잃어간다. 원작에서는 이런 그들 앞에 크리스티앙을 만나기 위해 라그노와 함께 먹을거리를 챙겨 온 록산느가 기적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록산느>에서는 원작이 주목하지 않았던, 전쟁터를 향해 힘겹게 나아가는 록산느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성 인물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성녀 혹은 여신의 모습이 아니라 독립된 서사를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국립극단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2025년 공연 장면. / 사진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2025년 공연 장면. / 사진제공. 국립극단
작품 속 ‘달’이 가진 의미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원작에서 ‘달’은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2인 1역을 은은한 빛으로 감춰주는 배경이자, 작 중에 등장하는 대사에서도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러 차례 활용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터에서도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록산느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는 시라노의 헌신적인 사랑을 상징한다. 세상 모든 곳을 비추는 사랑이 달빛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록산느>는 이러한 ‘달’의 비유를 록산느에게로 확장한다.

전쟁 중 사망한 크리스티앙을 그리워하는 록산느를 향해 시라노는 떨어지는 꽃잎들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모습을 찬미한다. 그 말을 들은 록산느는 ‘자신은 꽃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시라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꽃이 되지 마. 꽃을 비추는 달이 되렴.” 사랑을 받는 대상에서 헌신적인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 있게 행동하는 주체로 록산느를 설명해주는 지점이다. 그렇게 남성들의 사랑을 받던 록산느는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적 서사를 통해 재해석된다.

<록산느>는 원작의 결말에서 한 장면 더 나아가며 슬픈 사랑 이야기에 희망의 가능성을 더한다. 두 사람이 합작한 사랑의 진실을 고백하고는 세상을 떠난 시라노의 죽음 앞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잃는구나”라며 더 큰 슬픔에 잠긴 록산느의 모습으로 원작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록산느>의 에필로그에서 록산느는 그 슬픔을 딛고 일어나 달을 향한 모험을 떠난다. “달이 되어라”는 시라노의 말을 진취적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다소 급작스러운 전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던 록산느가 우주복을 입고 객석을 가로질러 극장 문밖으로 나설 때 관객들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나아가는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을 마주하게 된다.
국립극단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2025년 공연 장면. / 사진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2025년 공연 장면. / 사진제공. 국립극단
물론, 록산느를 입체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재조명하는 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작품의 서술자 역할은 세 명의 남성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고, 세 명의 남성이 한 명의 여성에게 사랑을 갈망하는 설정이 강조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으로 인해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랑 혹은 영감의 대상인 ‘뮤즈’처럼 묘사되는 부분 또한 일부 존재한다. 앞으로 <록산느>가 시대와 호흡하는 레퍼토리로 지속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록산느>는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이지 않더라도 고전 속 인물에 대한 입체적 재해석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작품의 모든 구조를 뒤엎거나, 현대를 배경으로 재창작한다거나, 혹은 일반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예술적인 방식을 반드시 채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텍스트와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성실하고 꼼꼼한 디테일을 더하는 방식만으로도 어느 정도 달성이 가능하며, 더 많은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

고전의 동시대적 재해석이란, 결국 ‘시대착오적’인 고전의 단점을 넘어서며 고전이 가진 장점들을 유의미하게 지속하는 모든 실천의 과정이다.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해체하지 않더라도 작은 시도로부터 보여줄 수 있는 예술적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소극적인 실천이 불만족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동시대적인 재해석이 미약하게나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걸 시작으로 조금씩 과감하게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록산느>의 시도가 10년을 이어온 지난 흐름에 안주하기보다, 지금까지의 시도들을 바탕으로 더 도전적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박진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