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선율이 아닌, 자연인이 피아노로 빚어내는 자연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26일 예술의전당에선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날 피아니스트 박창수는 일본 음악감독이자 피아니스트인 치노 슈이치와 함께 즉흥연주 공연인 ‘박창수의 프리뮤직-침묵을 자유롭게 하다’를 선보였다. 2019년, 2023년에 이어 마련된 이번 세 번째 무대에서 둘은 연주곡을 위한 사전 논의도, 약속도 일절 하지 않는 파격을 선보였다.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박창수의 프리뮤직-침묵을 자유롭게 하다'의 공연 모습. ⓒShin-joong Kim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박창수의 프리뮤직-침묵을 자유롭게 하다'의 공연 모습. ⓒShin-joong Kim
대지의 울림을 빚어내는 피아니스트

박창수는 앞선 두 번의 공연에서도 파격을 보여줬다. 2019년 공연에선 의자 밖으로 몸을 내동댕이 치고, 2023년 공연에선 안대로 눈을 가리며 피아노를 연주했다. 약 90분에 걸쳤던 이번 연주가 현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았던 배경이다. 이번 공연에서 치노와 함께한 박창수는 짧은 휴지부를 여러 번 두거나 서로의 피아노를 바꿔 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조성에 얽매이지 않고 무질서하게 연주를 하는 듯 보였지만 그 무질서 속엔 조화가 있었다. 박창수는 땅이 됐고, 치노는 하늘이 됐다. 둘은 합을 겨루는 검투사들처럼 각자 소리를 얼기설기 주고 받으며 음양의 교차를 풀어냈다. 엇갈려 붙어있는 두 피아노의 모습은 태극무늬 같기도 했다.

박창수가 세 차례의 공연에 걸쳐 지켜온 주제는 ‘침묵을 자유롭게 하다’. 두 연주자는 침묵에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소리를 철저히 예속시켰다. 박창수는 단단한 저음 속에서 이따금 거목이 쩍 갈라지는 듯한 고음을 불규칙한 간격으로 벼려냈다. 손날로 피아노를 두들기는 모습은 땅을 울리는 야수의 발소리 같았다. 인접한 두 음을 빠르게 반복해 오고가기를 10초 이상 계속할 땐 동물 떼의 이동으로 생긴 땅바닥의 울림이 들리는 듯했다. 긴 휴지가 이어진 뒤엔 박창수가 신발로 공연장의 마룻바닥을 두들기기도 했다. 귀로 소리를 듣는다기보다 피부로 진동을 느끼는 쪽에 가까운 연주였다.

중력에 저항하는 피아니스트

박창수가 대지의 울림을 전했다면 치노는 지반 위의 들뜬 대기를 그려내는 쪽에 가까웠다. 중고음역대를 빠르게 휘몰아치는 순간들이 그랬다. 치노는 망치로 때리는 듯한 주법 대신 건반 위를 빗자루로 휩쓰는 듯한 타건을 했다. 손가락은 대지를 쓸어가는 바람이 됐다. 치노는 이따금 가상의 건반이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손을 휘젓기도 했다. 연주자들의 몸 전체로 보면 땅과 하늘의 대조는 더 분명했다. 검은 옷과 검은 머리의 박창수는 땅에 꼿꼿히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허리를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관객이 의자가 아닌 마룻바닥에서 관람하도록 한 ‘하우스콘서트’를 만들었을 정도로 지면에서의 감각에 민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박창수의 프리뮤직-침묵을 자유롭게 하다'의 공연 모습. ⓒShin-joong Kim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박창수의 프리뮤직-침묵을 자유롭게 하다'의 공연 모습. ⓒShin-joong Kim
반면 치노는 바람을 타고 노니는 새와 같았다. 풀빛이 섞인 에메랄드색 셔츠를 입은 그는 흰 머리를 휘날리며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움직임이 커질 땐 두 허벅지 사이의 각도가 90도 가까이 벌어지고 몸의 정면이 피아노와 수직을 이루기도 했다. 발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한없이 나풀거렸다. 예술의전당에서 발이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피아니스트를 보기란 쉽지 않다. 치노가 “박창수는 어떤 피아니스트와도 닮지 않았고, 내가 제일 안 닮았을 거다”라고 말한 이유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둘은 대비가 선명했다. 무질서에서 대비를 통한 균형감으로 질서를 빚어낸 두 피아니스트는 변화무쌍한 가운데 거대한 이치를 품고 있는 자연과 닮아 있었다. 디지털 음원처럼 귀를 쓰는 일만으론 경험할 수 없는, 공연장에서만 누릴 있는 광경이었다.

침묵에 자유를 부여하는 소리 예술의 방법

두 연주자가 서로의 대비로 표현하려 했던 공연의 주제로 돌아가자. 침묵이 무라면 소리는 유다. 침묵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선 부자유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는 소리의 부자유를 드러내는 것으로 구현된다. 박창수는 건반이 눌리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두들기면서 손가락과 건반의 마찰음만으로 소리를 내거나 손톱으로 건반을 타격하는 소리를 냈다. 인접한 두 음을 동시에 누를 땐 이 음들 사이의 경계를 파고드려는 듯했다.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박창수의 프리뮤직-침묵을 자유롭게 하다'의 공연 모습. ⓒShin-joong Kim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박창수의 프리뮤직-침묵을 자유롭게 하다'의 공연 모습. ⓒShin-joong Kim
하지만 피아노의 건반은 인접한 두 음 사이의 음을 내지 못한다. 분절로 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건반악기의 한계다. 발을 구르고 손날과 손톱으로 건반을 때리더라도 연주자는 조음의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 연주의 마지막 순간 치노는 의자에서 일어나 피아노 건반대를 손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그리곤 건반에 이어진 현을 뜯으려는 듯했지만 이내 손을 놓았다. 조음의 자유를 탐하려는 연주자의 열망이 무위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결국 연주의 마지막을 채운 건 음에 얽매이지 않게 된 침묵뿐. 빽빽한 소리들의 유한함은 그렇게 침묵의 자유로움을 확인시켰다. 침묵의 자유에 대한 이들의 탐구는 소리의 부자유를 샅샅이 두들기는 90분 간의 치열함으로 완성됐다.

두 피아니스트의 합을 볼 기회를 놓친 이들은 하우스콘서트에서 날 것 느낌이 나는 클래식 음악을 체험할 수 있다. 2002년 박창수가 자신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개조해 시작했던 이 마룻바닥 공연은 지난 24일 1083회 공연을 마쳤다. 과거 공연들에 조성진과 김선욱, 임윤찬 등도 오갔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1084회 공연은 다음 달 10일 열린다. 지휘자 김재원이 이끄는 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와 함께 클래식 색소폰의 매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