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 나스닥 상장은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이 기술 전쟁을 넘어 자본 전쟁으로 판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 조달한 자금은 265억달러(약 40조원)에 달한다. 외국 기업의 미 증시 자금 조달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상장은 K반도체의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했을 뿐 아니라 한국 기업이 세계 최대 자본시장과 연결되는 이정표도 세웠다. 글로벌 투자자의 관심 속에 원주 가격보다 높은 수준의 ‘프리미엄 프라이싱’(공모가 할증)을 기록한 점도 의미가 크다. 공모 물량의 일곱 배에 달하는 청약이 몰렸다. 모두 회사의 성장성에 글로벌 자본시장이 신뢰를 보냈다는 방증이다.

이번에 확보한 자금은 SK하이닉스가 개척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1위를 유지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청주 첨단 패키징 공장에 이어 신규 메모리 클러스터 투자까지 감안하면 필요한 투자액은 상상을 초월한다.

SK하이닉스의 ADR 상장 하루 전 미국 마이크론은 2035년까지 미국 내 투자를 2500억달러(약 375조원) 이상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기술력만으로 승부하던 시대는 끝났다. 누가 더 빨리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 증설에 속도를 내느냐의 싸움으로 넘어갔다.

아쉬운 점은 한국 자본시장의 현주소다. 한국은 글로벌 제조기업을 보유하고도 성장 자본 조달과 투자자 유치를 위해 해외를 찾아다녀야 한다. 이번에 월가 투자은행(IB)이 챙긴 수수료만 1억4000만달러(약 2100억원)에 이른다. 제조업 경쟁력의 과실을 금융이 함께 거두지 못하는 구조다.

정부도 자본시장 선진화가 구호에만 그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기업 지배구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 신뢰 부족도 원인이다. 유상증자를 금기시하고, 배당과 자사주 매입만 압박해서는 투자 확대를 통한 기업가치 재평가는 요원하다. ADR 상장이 보여준 놀라운 성과에 마냥 박수만 치지 못하는 이유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자본시장이 기업에 성장 자본을 공급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