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고 무너뜨리는 것들에 관하여, 그리고 한 지붕 아래 승부사

[arte] 최영균의 공간탐구 of NETFLIX

영화 속 '집'

아버지와 아들 : 조훈현과 이창호

"바둑의 신하고 둔다고 해도, 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어. 그놈 바둑이 커서 어떻게 될는지"
조훈현은 어린 자녀 옆에 누워 아내에게 중얼거린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일류가 아닌 인생은 너무 서글픈 거거든”

바둑 기사 조훈현과 이창호. 두 사람의 관계는 이 단순하면서도 잔인한 규칙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 <승부>는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를 향해 날 선 칼날을 겨누는 두 기사(무사)의 이야기다.

바둑과 건축 : 맥락 위에서의 판단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가 바둑을 처음 배운 건. 무엇하나 판단할 능력도 없는 나이에 겨우 2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밤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둑판 삼아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 두곤 했으니까. 아버지와는 종종 거실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패하면 분해서 울기도 여러 번 울었다. 항상 이기고 싶었으니까. 승부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 바둑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구글의 알파고가 바둑판에서 인간을 밀어냈다. 사실 체스는 이미 1997년, IBM의 '딥블루'가 챔피언을 꺾은 바 있다. 기물마다 움직임이 명확히 규정된 체스는 컴퓨터가 계산하기에 상대적으로 쉬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은 다르다. 체스가 개별 말의 움직임에서 전략이 뻗어나간다면, 바둑은 전체 판세와 흐름을 먼저 읽는다. 이는 개별자를 중시하는 서양적 사고와, 관계와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와도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때문에 바둑에서는 같은 위치에 놓인 돌이라도 주변 형세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판에서는 판을 뒤집는 신의 한 수였다가, 다른 판에서는 악수가 되어 패배의 원인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둑과 건축은 서로 닮아있다. 바둑돌 하나만 보고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없듯 건축도 개별 건물만 보아서는 의미를 판단할 수 없다. 어느 도시에 놓이고, 어느 길과 마주하는지, 근처엔 무슨 건물이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건축물이 된다. 건축도 결국 맥락을 읽는 일이다. 어릴 적의 바둑 경험은, 맥락으로서 대상을 바라보게 하였고 그 때문인지 건축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
영화 &lt;승부&gt; 스틸컷. [차례대로] ‘따뜻한’ 집・식사・대국・차 (아래의 스틸컷과 비교해 보시기를) / 사진. © 넷플릭스
따뜻한 집 - 두 사람의 조화

마당이 있는 2층짜리 전원주택. 조훈현은 어린 제자 이창호를 자신의 집으로 들였다. 이창호에게 그 집은 그저 스승의 집이 아니라 한 소년이 새로 태어나는 공간이었다. 바둑은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정신을 함께 길러야 하는 일이다. 때문에 스승과 제자가 도제식으로 일상을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식이었다. 조훈현이 자신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에게 익힌 방식 그대로였다.

집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밥 냄새가 났다. 이창호는 조훈현의 아내를 작은어머니라 불렀고, 작은어머니는 어린 창호를 친아들처럼 살갑게 챙겼다. 밥을 나누어 먹는 사이, 말 그대로 식구(食口)였다. 이창호는 바둑 실력만 자란 것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의 성장이 모두 그 집의 지붕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나이 차가 컸던 조훈현은 이창호를 진짜로 아들처럼 키웠을 것이다.

조훈현은 이미 일류 기사였다. 수많은 타이틀을 쌓아 올렸고 그 자부심은 대단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도 했겠는가.

“바둑의 신하고 둔다고 해도 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자신감은 오만이 아니라 사실이었고, 오랜 기간 자신을 지탱해온 믿음이었다. 이창호는 그런 스승을 늘 조심스럽게 따랐다. 집에서는 스승이자 아버지였고, 바둑판에서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로 쌓아 올린 시간과 신뢰로 가득한 집. 그러나 집의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은, 늘 갑자기 찾아온다.
영화 &lt;승부&gt; 스틸컷. [차례대로] ‘차가운’ 차・대국・식사・집 (위의 스틸컷과 비교해 보시기를) / 사진. © 넷플릭스
차가운 집 - 두 사람의 균열

타이틀 대회 결승전에서 마주 앉은 스승과 제자. 조훈현은 결승전까지 올라온 제자가 내심 자랑스러웠지만 내색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바둑은 늘 그렇듯 자연스럽다. 마치 대회가 아니라 제자를 가르치듯 손끝이 편안하고, 호흡에는 여유가 깃들어있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대국은 몇 시간을 지나 점심시간을 맞는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 앉았지만 서로를 쳐다보지도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는다. 얼음장 같은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싼다. 집에서와 바둑판에서의 분위기가 딴판이다.

다시 이어진 대국에서 분위기가 뒤집힌다. 이창호가 바둑의 흐름을 천천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더 이상 스승과 제자가 아니다. 서로를 베는 검을 쥔 막상막하의 무사 두 명이다.

12시간이 넘는 전쟁 끝에 조훈현은 패배를 받아들인다. 겨우 반집 차. 진검승부 끝에 현장의 모두는 침묵했다. 그 안에서도 가장 깊은 침묵에 빠진 사람은 조훈현이었다. 긴 침묵 끝에 이창호가 간신히 입을 뗐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청출어람. 스승으로서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지만 마음은 세차게 흔들린다. 10년은 더 걸릴 줄 알았으나 갑자기 맞이한 패배를 어찌할 줄 모르겠다. 제자의 승리가 기쁘면서도 뼈아프다.

전쟁을 마친 두 무사는 더 이상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한다. 낮에는 바둑판 위에서 서로의 집을 두고 싸우고, 밤이면 같은 집으로 돌아온다. 따뜻해야 할 그 집엔 이제 서늘한 기운만 감돈다. 집과 집, 둘 사이의 경계에 균열이 생긴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창호는 조훈현의 타이틀을 하나둘씩 빼앗아 온다. 그럴수록 집은 점점 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쉬는 공간이 아니라 예리한 감각을 유지해야 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결국 두 사람은 이 ‘못 할 짓’을 멈춰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차가운 눈이 내리던 날, 이창호는 조훈현의 집을 떠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벗어나 비로소 대등한 경쟁자이자 동반자로 마주 서는 순간이다.

짓고 짓고 짓는다

우리말 '짓다'는 유난히 넓고도 깊다. 우리는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는다. 그리고 글을 짓는다. 모두 시간과 애정을 들여 삶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영화 <승부>의 두 사람도 그랬다. 같은 집에서 의식주를 공유하는 사람들. 바둑은 두 사람을 이어준 끈이었지만 결국 그 바둑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같은 지붕 아래 서로를 묶어주던 ‘집’이, 바둑판 위에서는 서로가 무너뜨려야 하는 ‘집’으로 뒤바뀐다. 그렇게 두 집을 함께 오가던 두 사람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생각해본다.

이 글을 짓는 내내 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싶었다. 이제 승부는 중요치 않다. 어릴 때처럼 분한 마음에 울 일도 없다. 오랜만에 바둑판에 마주 앉아 그저 웃음 짓고 싶다.

최영균 칼럼니스트